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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하이교의 가르침
RevSuh  2020-09-30 15:23:57 hit: 11

2. 바하이교의 가르침

1) 기본적으로 주장하는 개념들
  바하이 신앙은 지속적인 계시를 주장한다. 바하이 신앙은 계시에 진화론적 원리를 적용한다. 왜냐하면 계시는 세계 종교의 전개에서 발전하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에펜디(S. Effendi)는 바하이 신앙의 원리를 설명하며 "종교적인 진리는 절대적이 아니고 상대적이다. 신적 계시는 순차적이요 지속적이며 진보하는 것이지 돌발적이거나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바하이 신앙은 모든 종교의 영적 기초는 하나님이며 각 종교의 율법과 사회적 가르침들은 시대와 장소 그리고 그 사자의 출현에 따라 변한다고 한다. 또 시대마다 나타난 그 사자들, 곧 신의 현현 인물들의 수와 그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꼭 일치하지 않는다고 본다.
  밥과 바하울라 양자는 그들 전에 6명의 하나님의 현현이 있었는데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그리고 모하메드였다고 한다. 압둘바하(바하울라의 아들)는 거기에 조로아스터(Zoroaster)와 부처(Badda)를 더해 8명이라고 한다. 현재의 바하이에서는 아담과 노아를 명단에서 제외시키고 전체를 9명에서 12명으로 추가했는데 알려지지 않은 선지자 크리쉬나(Krishna), 아브라함, 허드(Hud), 살리(Salih), 모세, 조로아스터, 부처, 그리스도, 모하메드, 밥 그리고 바하울라이다.
  이렇게 계시의 지속성과 진화를 믿는 이들은 자주 새로운 선지자를 인류에게 보내는 이유가 인류의 현재의 필요에 부합한 갱신된 종교를 위해서라고 본다. 따라서 하나님은 시대마다 그 시대와 환경에 맞는 선지자를 보내신다는 것이다. 이런 선지자나 신의 현현자들을 보내시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지식에 가까이 다가오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바하이 신앙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부패하게 된 신앙을 갱신하는 것이다.
  바하이 신앙은 기독교와도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바하이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알고 믿지는 않는다. 저들은 성경의 교훈을 바하이 신앙에 맞춰서 해석한다. 마치 통일교의 주장처럼 성경의 그리스도의 재림이 바하울라의 옴으로 성취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바하울라가 약속된 메시아가 되며, 그의 교훈은 예수나 신약의 교훈을 능가한다.
  그들은 기독교가 성경을 잘못 이해했다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의 이해에 실패자였기 때문에 예수를 반대했으며, 오늘날 기독교는 성경을 오해하기 때문에 바하울라를 반대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2000년 전 유대인의 잘못을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2) 하나님은 알 수 없는 분이다
  바하이 신앙은 이슬람처럼 유일신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종교를 그들의 신앙 아래서 연합하려고 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다른 종교의 하나님, 곧 그가 알라든 야웨든, 그렇지 않으면 부처든 상관없이 이런 이름들은 모두 같은 존재에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알 수 없는 분이기에 바하이 신앙은 하나님을 정의하지 않는다. 압둘바하에 따르면 하나님의 실제는 모든 이해로부터 감추어져 있으며 모든 사람의 정신에서 숨겨져 있다. 그 수준(하나님)으로 올라가기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의 본질에서 고대의 영원부터 가려져 왔으며, 그의 실체는 인간의 시야로부터 영원토록 감추어져 있다. 그리고 본질 중에 본질이요 진리 중에 진리요 신비 중에 신비이신 하나님은 존재의 세계에서 반사, 서광 풍채와 찬란함을 통해 자신의 무엇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방법 중에 하나는 그의 계시자들을 통하는 것이다. 이런 계시자들의 계시에 의해 하나님의 모든 이름과 속성들, 지식과 능력, 주권과 다스림, 자비와 지혜, 영광, 관대함과 은혜가 드러난다. 그럼에도 이런 계시자들은 하나님의 성육신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성육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본 대로 바하이의 하나님은 비인격적이며 하나의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그래서 실제로는 알 수 없는 신이요 정의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서로 다른 종교들이 이름을 달리하지만 한 하나님이라는 바하이 신앙의 주장은 옳지 않다. 힌두교나 불교는 환생을 가르치는데, 바하이는 이를 부인한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며 예수는 아들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치나, 바하이는 단지 하나님의 계시자(표명자)일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모든 종교를 바하이 신앙으로 통합시키려는 목표는 성취될 수가 없는 것이다.  
  바하이의 관용에 대한 주장도 문제가 있다. 바하이 신앙은 모든 종교가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같다고 본다. 다만 지엽적인 문제들에서만 차이가 있기 때문에 모두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서로가 믿음에 있어서 관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우만 보아도 바하이의 주장은 잘못되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그 시대와 장소에 맞는 선지자(하나님의 명시자)들을 보내시는데 그 최종 선지자가 바로 바하울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로 기독교의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요 재림의 그리스도라고 한다.
  그러니 이런 주장은 성경을 억지로 적용시키는 것이며, 기독교의 목사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이는 바하이교의 신앙만이 옳다는 주장인데 어찌 그것을 다른 종교들에 대한 관용이라고 하겠는가?
  성경은 바하울라에 대해 말씀하지 않는다. 성경은 차라리 말세에 거짓 그리스도와 선지자들이 일어날 것을 경고하고 있다(마 7:15-16; 고후 11:13-15). 바하울라가 메시아라는 주장 역시 성경에 맞지 않는 것은, 메시야는 유대인으로 오시지 이란인으로 오시지 않기 때문이다(삼하 7:12-13; 마 1:1; 3:16; 8:17; 눅 1:31; 계 5:5). 그리고 그 예언은 예수의 인격에서 이루어졌다(사 7:14; 9:6-7; 11:1-2; 40:1-5; 53:4-5).
  예수님의 재림에 관해서도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시고 승천하신 그 예수가 인격적으로 다시 오신다(행 1:9-11). 그리고 재림 때는 지상에 대격변이 있을 것이다(마 24:29).
  그들은 바하울라가 바로 예수님이 요한복음 16:12-13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자, 모든 진리로 인도할 자, 진리의 영으로 오실 자라고 하나, 거기서 예수님은 성령님의 강림을 언급하셨다. 그리고 실제로 성령님은(요 14:16-17, 26) 예수님의 예언 몇 날이 못 되어 오셨다(행 1:5). 그러나 바하울라는 1800년 후에 출생했다. 역시 성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고 하셨는데(요 14:16) 바하울라는 75년만 살고 죽었다.
  
3) 예수는 가짜 예수다.
  바하이교에서는 예수(메시아)는 다른 예수요 적그리스도라고 믿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라고 주장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시다(요 3:16). 독생자라는 뜻은 유일한 동질의 사상을 전달해 준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그만이 이것이다’란 뜻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그가 아버지와 같은 본성을 지니셨음을 의미한다. 즉 신성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은 그가 하나님이시란 말과 같았다. 따라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가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다고 고발했다(요 5:18).
  우주와 만물의 창조주는 하나님이시다(사 44:24). 신약 성경은 예수님이 창조의 대리인이라고 말씀한다(골 1:16). 만물이 그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그를 위해서 창조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자란 말씀은 성경 여러 곳에서 나온다(요 1:3; 히 1:10; 계 3:14).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의 창조자란 말은 그의 신성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란 의미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이시다.
성경은 예수님은 아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한다(시 7:14; 요 1:1, 14, 18; 히 10:1-10; 빌 2:5-11). 성육신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을 지닌 채 인성을 입으셨으므로 신성과 인성의 양성을 지니셨다(요일 4:2-3).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했다(골 2:9).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었다(마 1:23). 예수님은 하나님의 가장 분명한 계시이셨다(요 1:18). 따라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나를 보낸 자를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요 12:45).

4) 바하이 신앙의 율법
  바하이 신앙은 시대마다 그 시대에 적합한 그리고 각 시대의 특별한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종교적 대표자들이 왔다고 한다. 이런 신앙의 취지에 맞도록 바하울라는 기도, 금식, 결혼, 이혼, 상속 등을 규정하는 율법을 상세하게 제정했다. 이 율법은 엄격한 복종이 요구된다. 또 바하이 교도들은 매일 세 번씩 얼굴과 손을 씻어야 하며 바하울라의 무덤을 향하여 의무 기도문을 외워야 한다. 그들은 매일 목욕하고 앉아서 ‘알라 우 아바’(Allah-u-Abha) 곧 ‘최고 영광의 하나님’을 95회씩 반복해야 한다. 그리고 매해 3월에 일출부터 일몰 때까지 19일 간을 금식해야 한다. 결혼에서 남자는 둘 이상의 부인을 가져서는 안 되며, 남자는 2.4온스의 금이나 은을 지참금으로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여자가 처녀가 아님이 밝혀질 경우 그 반환을 요구할 수 있다. 바하이 교도들은 재산을 2,520 몫으로 나누어 공식적으로 가족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기타 바하이 교도의 행동 지침에는 ‘경전을 연구하라, 음식을 손으로 먹지 말라, 이란 사람의 목욕탕에 들어가지 말라’가 있다.
그러나 이런 바하울라의 율법은 그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 그리고 앞으로도 모든 사람들에게 적합하지가 않은 것들이다. 따라서 바하울라는 하늘이 내린 마지막 선지자로 오늘과 장래 시대에 적합한 율법을 만들었다는 주장은 맞지 않는다. 그의 율법은 그의 추종자들, 그것도 그의 시대에 특정한 지역에 한하여 적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이 될 수는 없었다. 실제로 그의 결혼에 대한 법이나 재산 상속법이 모두 후계자들에 의해 개정 내지는 삭제되었다.  그뿐 아니다. 많은 율법들이 연기되고 삭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하울라의 율법책인 ‘키타비 아 크다스’도 오늘날 널리 사용되지 않고 있다.
  바하울라의 율법책이 옛날 그 시대의 법으로서 이제는 부적합하게 되었다면, 모세의 율법 중 그 핵심인 십계명은 오늘날까지도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적합한 법으로 변경하거나 삭제할 필요가 없다.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의 구약성경은 변경이나 삭제 없이 지금까지도 읽혀지고 적용되고 있으며 세상 끝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예수님은 친히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루러 왔다”고 하셨다. 그 예수님은 모든 날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기 위해 오신 아들이시다(히 1:1-2). 그리고 그가 가르치신 율법은 사랑으로 시대나 장소와 상관없이 만인이 지켜야 할 영원한 진리다.

5) 인간론
  바하이는 인간은 누구도 완전하지 않다고 하지만 원죄는 부인한다. 사람이 비록 잘못은 하지만 그들의 본성에 내재하는 악한 요인들은 없다고 한다. 바하이는 원죄의 교리는 하나님의 사자들이 가르친 것이 아니고 16세기에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바하이는 죄는 사람이 배우는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죄를 배우지 않으면 사람은 완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교화를 통하여 사람은 선을 발전시키고 악을 제거할 수 있다. 오랜 교육과 윤리적 가르침을 통해 인간은 모든 문제들을 교정할 수 있다고 한다.
  바하이 신앙에서는 인간은 원죄가 없으며, 죄는 모방이나 환경의 탓이고, 교육과 윤리의 가르침으로 완전해 질수 있다. 따라서 바하이 신앙에서 구원은 십자가의 속죄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다. 바하이의 구원은 자력구원이다.

6) 천국과 지옥
  바하이는 천국과 지옥을 말한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아니다. 그들은 문자적인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다. 바하이의 천국과 지옥은 존재의 상태를 가리킨다. 천국은 하나님에 대해 알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지옥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 행복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천국에 있다. 다른 사람이나 자신을 싫어하는 자 혹은 항상 불행할 때 그는 지옥에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바하이의 천국과 지옥은 실제적인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며 외적인 상태이기 보다는 내적인 상태를 가리킨다.
  이런 경향은 아래와 같은 표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천국은 부분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상태로 볼수 있고, 지옥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상태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아직 지상에 있는 동안 우리 자신의 천국이나 지옥을 경험할 수 있다. 천국은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는 것이며 지옥은 그런 조화의 결여다.
  바하이는 사후에 사람은 선행을 한 결과로 개인적 불멸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후의 생명의 정확한 본질은 신비로 남아 있다. 그는 죽음 이후 영혼의 상태는 결코 묘사될 수 없다고 한다. 다만 몸에서 분리된 후에 영혼은 하나님의 임재에 도달할 때까지 진보가 지속될 것이라고 한다.
  바하이의 구원관은 일부분 기독교의 구원관과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그 구원관은 인간은 선하며 선행을 통해서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결과인 천국은 문자적인 장소의 천국이 아니며 마음의 상태일 뿐이다.
  하지많 성경은 분명히 장소로서 천국과 지옥을 말씀하며, 지옥을 제일 많이 말씀한 분이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은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으며(마 10:28) 불타는 지옥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범죄한 몸의 지체를 잘라내는 결단을 촉구하셨다(막 9:43-47). 그만큼 지옥은 불도 꺼지지 않는 고통이 극심한 곳임을 암시해 준다. 지옥은 바하이의 주장처럼 마음의 불행한 상태나 양심의 괴로움 정도가 아니다.

7) 바하이교의 예배 및 중요한 날
⑴ 예배
  바하이의 예배당은 기독교의 교회, 유대교의 성전 혹은 이슬람의 교당과 같은 목적이다. 현재는 모든 대륙에 예배하는 집이 있다. 예배당은 모든 종교인들에게 공개되며 매일 예배가 있다. 일리노이주의 윌미트(Wilmette)에 있는 예배당에서 일요일 예배가 기도와 노래로 열리는데 목사는 없다.
 
⑵ 바하이의 성경 사용
  바하이의 변증가들이 자주 사용하는 아래 성경 구절에 대한 바하이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① 다니엘 8:13-17
    “내가 들은즉 한 거룩한 이가 말하더니 다른 거룩한 자가 그 말하는 자에게 묻되 환상에 나타난 바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과 성소와 백성이 내어준 바 되며 짓밟힐 일이 어느 때까지 이를꼬 하매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 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느니라 ...... 이 이상은 정한 때 끝에 관한 것이니라.”
  이 구절들은 그 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바하이교는 이 예언이 그들의 신앙에 대한 성경의 예언적 근거라고 주장한다. 압둘바하는 다니엘 9장이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정확한 예언이라고 한다. 그는 “유대인들이 70주야를 490년으로 계산했으며 아닥사스다의 성전 재건 칙령이 그리스도 탄생 전 457년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순교된 때는 33세였다. 따라서 457년에 33년을 더하면 490년이 되는데 그때가 다니엘이 그리스도의 출현을 알린 때”라고 한다.  
  압둘바하는 아닥사스다의 칙령 주전 457년에서 다니엘 8장 13-17절의 2,300주야를 빼면 주후 1844년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그는 바하울라(바하이교)가 성경에 예언되었음을 증명한다. 그러니까 다니엘 9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예언을 하고 있으며, 다니엘 8장은 밥의 도래를 예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의 바하이교의 해석은 19세기 재림론자들의 해석을 그대로 수용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2,300주야란 2,300일이거나 저녁과 아침을 하루로 계산해서 1,150일일 것이다. 2,300일은 정해진 중요한 시기로서 어쩌면 연대적 기간으로 6년이나 7년을 가리킬지 모른다.
  바하이교의 해석은 재림론자들의 해석과 안식교의 해석이 빗나갔듯이 잘못된 것이다. 다니엘 8장의 요지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빠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될 텐데 바벨론 포로가 그것이며, 후에 안디오커스 에파파네스에 의한 박해가 있을 것인데 이것은 유대인의 역사에서 최후에 있을 적그리스도의 환란이라는 것이다. 이 환란이 있은 뒤에 메시아가 오실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스도가 메시아로 오셨다. 따라서 이 구절이 메시아가 강림하신 지 1800년 이상이 지나서 바하울라가 올 것을 예언한 말씀이라는 해석은 전혀 맞지 않는다. 바하이교가 성경을 들어 바하울라를 예언된 메시아로 주장한다면 메시아가 누구를 통해, 어디서, 누구의 후손으로 오실 것에 대한 예언의 말씀과도 부합해야 한다. 그가 메시아로 왔다면 다윗 왕의 후손 유대인으로 동정녀를 통해 베들레헴에서 났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하이교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억지 해석이다.
  ② 이사야 11:1-10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바하울라의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이새의 뿌리에서 나는 자손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요셉이 다윗의 아비 이새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이 구절은 상징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시대에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다양한 야생 동물들은 다양한 민족, 백성들 적대적인 분파들 그리고 인종들을 상징하며, 그리스도의 영의 생기로 그들이 활기를 띄게 되었고, 함께 연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9절)이라는 상태는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때만이  아니라 바하울라 시대에 적용된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이 세상에는 다양한 적대 관계의 국가들이 존재한다. 아주 소수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 뿐 다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 세계 평화도 그리스도의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은 바하울라에 대한 말씀을 위해 적용된다는 것이다. 지구가 변화될 것이며, 인간이 사는 세계가 평온함과 아름다움으로 성장케 될 것이다. 분쟁과 다툼 그리고 살인이 평화와 진리 그리고 일치로 대치될 것이며, 국가와 백성 인종과 나라 중에 사랑과 친선이 있게 될 것이다. 협력과 일치가 구축될 것이며, 마침내 전쟁은 크게 억제될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예언은 압둘바하에 따르면 바하울라의 인격에서 이루어 질 것이라는 것이다.
  우선 이 구절이 가르치는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는 한 싹이나 가지는 이새의 후손을 가리키는데 압둘바하의 해석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것이 맞다. 우선 이 구절이 바하울라에게 적용되려면 그는 이새의 후손이어야 한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이 구절은 하나가 아닌 두 가지 사역을 가르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의 사역이 그것이다. 예수님의 초림 사역은 죄를 회개하고 그를 구주로 믿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친히 당신이 오신 목적이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고 검을 주러 왔다고 하셨다. 서로 불화케 되는 것이며, 따라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부모나 자녀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하신 것이다(마 10:34-36). 그러나 그를 따르는 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내적인 평안을 얻게 되리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그를 신뢰하는 자에게 내적 평화를 주기 위해 다시 오신다고 하셨다(요 14:2).
  세계 평화와 지구의 새 하늘과 새 땅으로의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게 될 것이다(마 24장).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세계의 연합과 평화를 구축하실 것이다(계 20:11-15; 마 25:31-46).
  재림 때에 그의 거룩한 산 지구는 하나님의 구속으로 온전하고 재창조된 세계로 변할 것이다. 성령으로 인해 야웨의 지식이 전해짐으로 온 세계는 울타리가 필요 없는 하나님의 성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야웨)에 대한 지식은 야웨에 대한 그런 관계와 헌신 그리고 교제의 방법이 가능해지고 쉬워지며, 그래서 그의 기쁨의 성취가 가히 모든 곳에 있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③ 요한복음 16:12-13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바하이교는 바하울라가 예수님이 예언하신 진리의 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 구절을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오실 진리의 영이 누구임을 밝히 말씀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예수님은 오실 진리의 영이 바로 보혜사 성령님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 약속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은 몇 날이 못 되어 곧 오실 분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승천하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선물을 기다리라 하셨다. 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다(행 1:4-5). 그러므로 요한복음 16장 12-13절에 약속된 오실 진리의 영은 바로 성령님이시고, 이 성령님은 오순절 날 이미 강림하셨다(행 2:1-2). 그리고 성령님이 오셔서 제자들을 통해서 하신 일이 바로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교회의 역사다.
  ④ 이사야 35:1-2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바하이교의 체니(Cheney)에 의하면 바하울라는 외로운 사막으로 추방되었다(팔레스타인의 아카(Akka) 감옥) 그리고 갈멜산 위와 샤론의 골짜기에서 가르쳤다. 그러므로 아주 문자적으로 이사야가 약속한 것과 꼭 같이 그의 나타남을 통해 주의 영광을 보았다. 체니는 바하울라를 영어로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한다고 번역했다. 그 명칭은 자주 성경에 의해 말세에 나타날 자에게 주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은 바하울라가 갈멜산과 샤론의 골짜기에서 가르친 것이 바로 그가 이 예언을 성취한 것을 증명한다고 한다. 그러나 어디 그곳에서 가르친 사람이 바하울라뿐인가? 그리고 ‘갈멜과 샤론이 주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 바하울라가 ‘하나님의 영광’이란 뜻이므로 그의 출현을 통해 주의 영광을 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하울라의 이름 뜻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증명할 수는 없다. 대체로 이름은 가장 좋은 뜻을 따라 짓는 것이 통례이며, 그런 좋은 뜻을 이루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소원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름과 인물이 같다는 논리는 맞지 않는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심판 후에 있게 될 구속의 축복을 말씀할 뿐 세계 평화와 연합을 가져올 페루시아 선지자(바하울라)가 올 것을 증언하지 않는다.
   ⑤ 이사야 9:1, 6, 7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사 9:1).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체니(Cheney)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 예언을 이루실 수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리라는 말씀 말고는 정부에 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한 이유 중에 하나라고 했다. 그들은 이 예언이 예수님 당시에 이루어질 것으로 오해했다고 한다.
  체니에 의하면 왜 예수님이 이 예언을 이루지 못한 이유가 두 가지 있었다. 첫째,  예수님은 결코 평화의 왕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둘째, 예수님은 결코 아버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 대신에 체니는 바하울라에게서 이 예언이 이루어진 몇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첫째, 바하울라의 빛이 이란에서부터 가장 어둡고 가장 완고하고 무지한 곳을, 그리고 그의 시대에 세계의 폭정 지역을 비췄다. 둘째, 100여 권의 저서를 통해서 세계 평화의 시대를 위한 정부의 완전한 계획을 개요했다. 셋째, 바하울라는 모든 종교, 인종 국가를 연합하여 함께 하나님 아래서 공동체 가족으로 이끌 자의 의미에서 아버지의 표상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그대로 실현되었는가? 아니 실현되어 가고 있는가? 바하울라는 죽었지만, 세계의 연합과 평화는 오지 않았다. 따라서 바하울라는 구세주가 아니다.
  참다운 세계의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천국의 실현으로만 가능하다(계 21-22장). 그것은 천국의 특성이기도 하다.
  체니는 예수는 평화의 왕이나 아버지로도 알려진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글리슨 아처(Gleason Archer)는 평화의 왕에 관해서 “그는 그 충만한 의미의 평화 살롬을 주실 것이다. 죄로 병든 영혼에게 건강을, 죄인들과 동료 죄인들 사이처럼 죄인들과 하나님 사이에 건전하고 건강한 관계와 세계(우주적) 의로움의 건전한 상태와 지구 구석에까지 미치는 번영이다.”
  이와 같은 참된 평화는 죄인 된 인간이 죄사함을 받음으로 하나님과의 평화가 우선되어야 얻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막고 있는 죄로 인한 담이 허물어져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죄의 담이 헐렸고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되었다(롬 5:8-10). 그리고 이제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천국이 세워지고 세계의 완전한 평화가 있게 될 것이다(계 21-22장).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되실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류폴드(H. C. Leupold)는 ‘영존하시는 아버지’ 대신 ‘영원하신 아버지’로 번역한다. 이 구절이 인격의 영원한 존재보다 영구한 아버지로서의 존재에 강조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글리슨 아처도 ‘영원의 아버지’로 보았다.
  그러면 아버지란 무슨 뜻인가? 영(Edward J. Young)은 “아버지란 그의 백성을 존중하시는 메시아의 특성을 가리킨다. 그는 그들을 향해서 아버지처럼 행동하셨다.....메시아는 하나의 영원한 아버지시다. 그는 영원한 분이시며 그 백성에게 한 아버지시다....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신 말씀은 이 구절의 의미의 핵심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한 것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와 구세주 그리고 왕으로서 그의 백성된 성도들에게 아버지처럼 사랑하시고 돌보시며 예비해 주시는 분이며 특별히 영생을 주시는 분이란 말씀이다.
  따라서 위의 구절에서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장래의 완성된 구원의 축복을 내다보았다고 할 수 있다.
  바하이 신앙은 성경을 인용하여 바하울라가 마지막 선지자 내지는 메시아라는 주장이나 바하이교의 우산 아래 세계의 종교와 정치를 하나로 통합시키려는 목표에서 너무나 통일교와 빼닮았다. 통일교도 성경을 인용하여 문선명씨가 재림주이며 그의 메시아적 사명이 세계의 종교와 정치를 통일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모두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만, 예수가 그의 사명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은 사명인 지상천국을 이루기 위해 자신들이 세상에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통일이나 종교의 통일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전쟁의 종식이나 참된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경대로 말한다면
모두 마지막 때 내가 그리스도요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적그리스도요 거짓 메시아요 거짓 스승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세계의 일치와 평화를 주장하며 건전한 생활을 위해 술이나 마약을 금하고 노름이나 한담 등을 피하는 것은 유익한 것으로 인정하고 오늘날 교회도 힘써야 할 삶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바하이 신앙과 기독교를 대조해 보면 다음과 같다.
    

바하이 신앙 기독교
성서바하울라의 작품 성경만임
하나님알 수 없는 분알 수 있고 인격적임
예수하나님의 표명절대적인 하나님
예수님의 죽음대속이 아님인간의 죄를 대속
재림바하울라예수님 자신
진리의 영바하울라성령
세계 종교들모두 진리임오직 기독교만 참됨
인간은 완전하며 타락하지 않음인간은 죄에서 타락함
구원바아이 율법을 지킴오직 그리스도를 믿음


요약과 평가

  바하이 신앙은 이슬람교에서 나온 하나의 이슬람 개혁파라고 할 수 있다. 모하메드를 따르지만 그 신앙과 계율이 같지 않으므로 많은 박해를 받아 왔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슬람교보다는 다른 종교에 배타적이지 않고 세계와 종교의 연합, 차별의 철폐 및 평화와 박애주의를 주창하기 때문에 모슬렘보다 친화적이며 포교에 거부감을 갖지 않는 이점을 지니고 있다. 세계 235개국에 5백만 명의 신자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바하이 신앙은 세 가지 기본 원리들을 포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치, 종교의 일치, 인류의 일치가 그것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바하울라가 메시아로서 예수가 이루지 못한 연합과 일치, 평화와 번영을 이룬다는 유토피아의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런 주장은 바하울라를 메시아로서 바하이교의 우산 아래로 세계를 통일하겠다는 야망으로 통일교의 목적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세계의 평화와 일치, 연합과 번영의 유토피아는 사람의 지혜나 인간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역사가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진정한 유토피아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재창조로만 가능하다. 따라서 바하울라 역시 문선명 씨처럼 거짓된 메시아나 예언자일 뿐이다.
  다만 박애주의, 모든 차별의 철폐, 건강한 생활의 강조로 마약과 술을 금하고 채식을 권장하는 관습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2000년 8월, 종교와 영적 지도자들의 평화 정상 회의가 미국의 의사당에서 개최되었다. 그 자리에서 바하이 국제 공동체 총무 알버트 링컨(Albert Lincoln)은 그 정상 회의의 초점은 평화를 위한 핵심 가치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세계의 진정한 문제는 도덕의 공백이며 현대 세계의 물질주의라고 정의했다. 1000명의 영적 지도자들 중에는 기독교 지도자도 포함되었다.
  이런 노력은 다원화 사회와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걸맞게 바하이교로 종교와 정치를 통일시켜 보겠다는 의지의 표명일 것이다. 모든 종교가 근본에서는 하나이며 지엽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므로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하면서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바하이교의 주장은 현대의 정신에도 잘 부합하는 것이어서 앞으로 더 많은 지성인들의 지지를 얻으며 세계화에 힘을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바하이의 모든 종교가 같다는 주장이나 바하울라가 메시야라는 가르침을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유일성,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주되심과 진정한 일치와 평화의 축복은 하나님의 역사로 죄의 세상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나라(천국)가 임함으로만 가능하다는 성경의 진리 위에 굳게 서야 할 것이다.
영어찬양 (노래가사) 영상모음집
제2장 바하이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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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춘웅 목사[Rev. David S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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