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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종교적인 믿음
RevSuh  2020-12-29 23:06:42 hit: 174

4. 종교적인 믿음

  초월명상의 기저에는 힌두교 신앙이 깔려 있기 때문에 마하리쉬가 말하고 이해하는 기독교의 신앙은 결코 성경적이 아니다.

1) 하나님
  초월명상의 신론은 근본적으로 만신론이다. 그것은 힌두교의 신앙과 같다. 마하라쉬는 성경에 계시된 무한하시며 인격적인 하나님을 부인한다. 마하라쉬의 하나님은 실재의 두 국면에서 발견된다: 절대적인 지고의 존재, 영원한 본성으로서 하나님, 자연 현상의 창조에서 최고의 수준에 있는 인격적인 하나님이다.
  이 최고의 존재는 자연과 동일시된다. 창조의 모든 것은 편재하시는 하나님, 나타나지 않는 절대적이고  비인격적인 존재의 표명이다. 이 비인격적인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존재다.
  인간 역시 하나님과 동일시된다. 각 개인은 그의 참된 본성에서 비인격적인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이 진화를 통제한다; 그의 인격 안에서 창조의 과정이 그 성취를 실현하는 최고로 전능한 존재의 하나님은 창조의 최고 수준에 있다. 그는 진화의 전 영역과 전 우주에 있는 수많은 존재들의 다른 생명들을 유지한다. 초월명상에서 하나님은 초월자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피조물과 구별되시는 초월적인 존재이다. 그분은 삼위일체로 계신다. 한 분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으로 계신다(마 3:16-17; 마 28:19; 고후 13:14). 그분만이 주시며 다른 하나님은 없다(사 45:18).


2) 예수 그리스도
마하리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많은 말을 하지는 않지만, 그가 한 말은 성경과 및 기독교와 전혀 다르다. 그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목적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모순된 주장을 한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생애를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메시지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았거나 고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고난의 말로 언급하는 것은 연민이다. 그리스도를 고난받는 자로 생각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어떻게 고난을 온전한 기쁨과 축복을 주장한 자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오해일 뿐이다.
마하리쉬의 초월명상에서는 예수를 교화된 혹은 개명된 인간으로만 보고 인류의 구주로 깨닫지 못한다. 따라서 마하리쉬는 성경을 전혀 읽지 않았거나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들의 상식과 논리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예정된 것이었고,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의 고난의 필요성을 역설하셨다(눅 24:25-26).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해 영광으로 들어가셔야 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기초라고 말씀한다(고전 15:3; 히 9-10장).


3) 죄와 구원
  마하리쉬는 그가 가르치는 길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한다. 사람은 절대적 존재의 영원한 자유로 영구하게 확립될 때만 모든 죄에서부터 자유하게 된다. 부라마빈두 우파니샤드(Brahmabindu Upanishad)는 죄의 거대한 산맥이 아무리 길더라도 초월명상을 통하여 절대자와 연합됨으로 무너진다고 했다. 그것 없이 출구는 없다는 것이다.
  초월명상은 죄의 영역에서 유일한 출구라고 주장한다. 마하리쉬는 초월명상을 함으로써 아주 쉽게 죄인도 아주 쉽게 죄의 영역에서 나와 덕스러운 사람이 된다고 한다. 환생에서 풀려나고(reincarnation) 절대적 존재와 연합하는 것은 초월명상자들이 추구하는 결과다. 마하리쉬는 “고요하라 당신이 하나님인 것을 알라 그리고 당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때 당신은 하나님으로 사는 것이 시작될 것이다”라고 한다.
  초월명상의 죄관은 하나님께 대한 잘못이나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잘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초월명상을 통해 죄에서 자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자신이 곧 신성의 하나님인 것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서 자신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의 선함과 명상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초월명상이라면 구원을 위해 외부의 도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구할 필요가 없다. 이들의 구원은 명상을 통해 스스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초월명상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초월명상의 구원관은 행위 구원이면서도 너무나 쉽고 단순한 값싼 복음이다. 따라서 초월명상이 제시하는 모든 문제의 해결로 인한 참 자유와 기쁨과 행복한 삶이란 하나의 환상이며 이상일 뿐 실제일 수가 없었다. 이는 그렇게 많았던 추종자들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사실이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인간은 타락했으므로 선하지 않으며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가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부가 아니며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자 하나님이신데 사람이 되셨으므로 신성과 인성을 지니셨다(요 1:1; 8:58; 20:28; 빌 2:1-11).
  죄는 명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초월명상에서 부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만 속죄될 수 있다. 베드로전서 3:18에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십자가에서 죄인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죄 용서와 구원을 받을 수 있다(요 3:16; 행 4:12). 초월명상으로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를 믿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 14:6; 요 1:12). 죄인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 중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한 성령의 역사로 된다(딛 3:5, 6). 따라서 구원은 죄인 스스로의 노력이나 행위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의 구주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구속의 은혜를 힘입어 죄에서 자유한 참된 구원을 받게 된다(롬 3:22-24). 구원은 초월명상이 주장하는 명상이나 주문을 외우는 것이나 신들에 대한 찬미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엡 2:8-10).
초월명상으로 스트레스와 인간의 제반 문제들이 해결되고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기까지는 참 만족이나 평안이 있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우리를 깨끗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기쁨의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다(히 9:14).
  초월명상은 과학적이며 전인 건강을 위한 비종교적인 기법으로 소개되면서 건강과 행복을 추구하는 많은 서구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사회학자 윌리엄 베인브리지(William S. Bainbridge)의 주장처럼 초월명상은 힌두교의 단순화한 형태를 서구에 소개하는 한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비종교적인 건강과 행복의 기법이라고 소개하여 기독교의 서구 사회와 부딪치지 않고 쉽게 용납 받는 길을 택했고, 그 결과로 기대 이상의 호응을 받고 공립학교에서 정부 지원금으로 시행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항상 그러했듯이 거짓된 위장술은 오래 가지 못한다. 거짓이 드러나면서 인기는 식었고, 정부의 지원은 중단되고 말았다. 아침 저녁으로 15-20분 간의 명상을 하는 것은 내적 평안과 긴장의 이완과 평안을 가져오며 걱정과 우울함을 경감시키고 지능과 창조력을 증가시킨다고 주장했으나, 오히려 부정적인 측면이 적지 않게 드러났다. 초월명상의 수행자들은 낭패와 동기 상실, 죄책감, 두려움과 실망을 나타냈다.  
  우리는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라”(골 2:8)고 한 바울 사도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초월명상에서도 배울 것이 있다.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상상 속의 비인격의 신이 아니라 창조주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유지자시요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아버지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묵상해야 한다. 그의 말씀과(시 1:3; 수 1:8) 그분의 인격과 성실하심(시 119편; 시 19:14; 48:9; 77:12; 104:34; 143:5)을 묵상해야 한다. 마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거룩한 지혜와 통찰력으로 채워지면 우리의 마음은 만족과 행복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다(시 1:3)

  힌두교와 기독교의 견해는 무엇이 다른가?

힌두교 기독교
진리상대적 절대적
하나님많은 신들한 분 하나님 - 야웨
예수개명된 자, 구주는 아님신적 메시아, 구주
인간의 문제신성의 무지거룩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
구원개명됨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음
환생믿음안 믿음
목적보편적 영혼과 결합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영생함



요약과 평가

  초월명상은 힌두교의 축소판이다. 초월명상은 종교로서는 세계화나 서구의 포교하는 것이 힘들 것을 안 마하라시의 치밀한 계산과 전략의 대안이다. 초월명상은 서구인들의 정신인 과학과 그들의 바람인 건강 및 운동(요가)으로 포장된 힌두교의 전령이다. 초월명상이 창조적 지성과학이나 명상학회가 아니라 종교임이 밝혀지면서 공립학교에서 실행이 불가능해지고 약속했던 결과들이 나타나지 않으면서 그 세력이 줄어들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기독교 안에서도 영성의 바람이 불면서 동양 종교의 영성이 종교 다원주의의 영향으로 서구의 많은 교회와 신자들에게 비판 없이 유입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동양적인 명상과 성경의 묵상이 결코 같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초월명상은 서구 사회에서 자기 능력 개발이나 생산성 높이기의 수단으로 기업에서 선호되고 있으므로 신자들에게도 지속적인 유혹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초월명상은 그 목적이 범죄를 줄이고, 평화를 증진시키며, 혈압을 낮추고, 행복을 증진시킨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자는 운동과 명상의 한 방법으로 소개되고 있는 요가도 건강이 전부가 아닌 힌두교의 상품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초월명상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들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다. 초월명상의 입문자들은 아침 저녁으로 매일 25분씩 50분을 명상을 위한 시간으로 쓰고 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매일 그들처럼 아침과 저녁,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50분만 할애한다면 그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그들에게 참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수 1:8; 시 1:1-2; 119:15; 143:5).
제4장 에켄가르
3. 초월명상은 유익하기만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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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춘웅 목사[Rev. David S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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