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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상(신학)
RevSuh  2022-01-30 21:32:33 hit: 82

7. 사상(신학)

1) 성경관 및 그 해석
  뉴에이지는 성경을 비롯한 모든 종교적인 경전은 상징주의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성경의 내용에는 숨겨진 비밀스런 뜻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해석 역시 비밀스런 기독교의 진리에 의해 해석되어야 하며, 이는 예수의 전수자들만이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비밀스런 기독교의 핵심은 모든 종교의 공통된 특징으로 모든 것은 하나이며 모든 것은 신이고 따라서 인간이 신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뉴에이지는 이 핵심 진리(일원론)로 성경을 해석한다. 그들은 성경이 뉴에이지의 세계관을 뒷받침해 준다고 한다.
  그들은 성경이 뉴에이지의 세계관뿐만 아니라 뉴에이지적 해석 방법도 확립해 놓았다며 성경 마태복음 13장을 들고 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구분하고 믿는 자(진실한 자)만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11절).
  물론 이런 해석은 마태복음 13장의 천국에 대한 비유에서 가능한 해석이긴 하다. 그리고 이런 가르침의 방식은 고대 철학자들인 풀라톤이나 피타고라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고대 헬라 스승들이 취한 방식이다. 즉 그들은 제자들, 즉 내부의 사람들에게만 더 관심을 가졌고 비유나 비밀스런 가르침을 깨닫게 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비유의 가르침을 베풀고 그것을 제자들에게만 설명해 주신 것도 사실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창조 때부터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셨으나(마 13:35; 비교, 10:26) 선택된 소수, 즉 들을 귀가 있는 자에게만 하셨다(13, 9, 16; 비교, 11:15; 13:43; 계 2, 7, 11, 17, 29; 3:6; 13:22). 제자들은 옛날 선지자들보다도 더 들을 귀가 있는 자에게만 시대에 살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제자들의 눈과 귀는 복을 받았다(13:16). 다시 말하면 제자들만이 좋은 땅임이 증명된 셈이었다(13:23). 그러나 예수님은 가르침에서 은밀하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공개적이셨으며, 모든 말씀을 비유나 일반 청중이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성경에는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 부분이 훨씬 더 많으며 문자 이외에 신비한 뜻을 캐려는 풍유적 성경 해석은 잘못된 해석 방법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만 더 자세하게 비유의 뜻을 설명해 주신 것은 다른 사람들과 의 차별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 때문이었다.
  뉴에이지의 선지자 엘리자베스 클레어(Elizabeth Clare)는 마태복음 11장 29절을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란 말씀을 나의 멍에(요가)를 지고 나를 배우라, 나의 은밀한 사역의 의식을 취하라, 세상의 카르마(Karma)의 짐을 짊어진 나의 그리스도의 상태(인격)를 취하라, 그리고 고대의 나의 구주(Guru)로부터 배우라. 왜냐하면 나의 멍에 요가는 하늘과 땅에서 쉽고 가볍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성경,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대속의 사역과 그의 가르침의 목적에 전혀 무지한 해석이다. 이 구절에서 멍에는 토라와 같은 것으로 배움의 짐이다. 제자는 어떻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살 수 있을지를 평생 배우는 자다. 그러나 이 배움은 짐이 아니라 영혼의 쉼을 가져다 준다. 그런 점에서 멍에나 짐은 순종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갈 5:1; 딤전 6:1). 예수님의 권위 아래 있게 될 때 우리의 심령은 진정한 쉼을 얻게 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짐 같고 멍에 같지만 그것을 질 때 참된 쉼을 얻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가질 때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뉴에이지는 성경뿐만 아니라 그 해석도 그들의 이론에 따라 억지로 짜맞추고 있다. 그들은 성경관과 성경의 해석 모두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2) 계시관
  뉴에이지는 계시의 원천이 많다고 주장한다. 계시는 예수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들을 통해서 온다고 한다. 뉴에이지의 원리에 의하면 모든 종교가 가르치는 핵심 진리도 같기 때문에 어느 종교에만 참 계시가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결국 모든 종교의 궁극적 진리는 하나이며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늘날도 교령술사들을 통해 계시가 계속 오고 있다고 주장한다. 교령술사란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정보들을 얻고자 하는 의도로 자신의 지각력과 인식력에 대한 지배력을 영적인 실체 혹은 영적인 실체 혹은 힘에게 내어주는 사람이다.
  또 다른 계시의 통로는 아카쉭 기록들(Akashic Record)인데, 이 지구는 마치 천체의 녹음기같이 인간의 생각, 의지 그리고 감정의 모든 것들이 찍혀 있는 아카사(Akasha)라고 알려진 광대한 영적 장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록들은 완전한 인류 역사의 기록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몇몇 뉴에이지 예언자들은 이 기록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뉴에이저들이 모든 종교는 동일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선 기독교와 다른 종교는 하나님, 계시, 그리스도 대속, 구원의 방법 등에서 전혀 다르다.
  더구나 기독교는 교령술을 거부한다. 그런 것은 사단이 사람을 속이려는 가장술이며(고후 1:14), 기독교인들은 영들을 시험해야 한다(요일 4:1). 또 기독교는 죽은 자와 접촉할 수 없음을 가르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으면 신자의 영은 천국으로 가며 불신자의 영은 지옥으로 간다. 따라서 자유롭게 왕래하거나 산 사람과 접촉할 수 없다(빌 1:23; 눅 16:19; 계 20:11-15). 만일 어떤 사람이 죽은 자와 접촉했다면 그는 필시 사탄의 졸개 귀신들과 했을 것이다.
  성경은 역시 성경 계시 외에는 참된 계시가 없다고 단언한다. 론 로우스(Ron Rhodes)는 유다서 1장 3절을 들어 기초적인 교리에 있어서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계시는 없다고 가르친다고 했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여기서 믿음 앞에 정관사(The)가 붙어 있음으로 단 하나의 유일한 믿음이며, 이 믿음은 교회를 주관하던 사도들의 교훈과 가르침이다(행6:7; 갈 1:23; 딤전 4:1). 또 믿음은 믿음과 신앙 자체만이 아니라 교리같이 믿어지는 그것을 말한다고 한다(Bauer, Arndt, Gingrich).  
  그리고 “단번에” 란 말은 한번에 행해졌고 절대로 다시 되풀이되지 않아도 되는 어떤 일이며, 이 믿음이 주어진 이후로 계시는 완성된 것이다. ‘주신’(주셨다)이라는 의미도 과거에 이루어졌으며, 이 문맥에서 동사의 시제는 단순과거 부동분사로 단 한 번에 모두 완성된 행동을 말한다.
  버캄(Richard J. Bauckham)은 여기서 믿음은 복음이요 기독교의 메시지이며 형식을 갖춘 교리의 중요한 부분을 함축한다고 했다.  켈리(J.N.D. Kelly)는 여기서 신앙은 메시지나 교회에서 정통으로 받은 구원하는 믿음의 실체를 가리킨다고 보았다. 물론 복음이나 메시지 믿음의 실체나 중요한 부분은 계시로 주어진 것이며, ‘한번에’란 말은 ‘세상의 끝까지’(마 28:20)를 가리킨다. 따라서 뉴에이지가 주장하는 것처럼 교령술사들을 통해서 전해지는 새 믿음(참 믿음)은 없다. 타락한 인간은 죄 때문에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으며 구원할 능력도 없다. 오직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르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써만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 구원받을 이름은 오직 예수뿐이며(행 4:12) 하나님께로 가는 길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요 14:6). 인간은 계몽이나 의식의 변화로 죄인이 하나님이라는 망상을 지님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요 3:16; 행 16:31).  

3) 하나님
뉴에이지에서는 일원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만신론이다. 그들은 자아 안에 하나님, 우주 안의 하나님을 추구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창조를 넘어서 존재하는 추상적인 존재를 추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사람은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와는 크게 다르다. 기독교의 신학에서 인간론, 창조자와 창조, 은혜와 자연 등등은 함께하지만 구별된다. 하나님은 내재하시며 역시 초월해 계신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창조를 돌보신다. 하나님은 창조 위에 계시며 그 너머에 계신다.
과학은 물질만이 실재라고 한다. 반면에 다양한 종교들은 영적인 것만이 참되다는 뉴에이지 사상을 공유한다. 기독교는 두 실재 사이를 구분한다. 하나님은 두 영역에 모두 필수적인 부분이 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 그러나 하나님은 역시 육신이 되셨으며, 우리 가운데 그의 거처를 만드셨다(요 1:14). 기독교는 성육신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곧 하나님이란 말은 아니다.

4) 그리스도와 구원
  뉴에이지는 하나님에 대해 인간 중심적인 대화를 하며 참고나 인용도 인간의 요점으로 마친다. 그들은  육체적으로는 진화되었을지라도 거기에는 동시에 높은 자아로 부르는 영적 본성이 있었다고 한다. 뉴에이저는 자주 이 높은 자아들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언급한다. 그들에 의하면 예수는 역사적인 인물이었으나 그를 추진시키고 영광을 주는 그리스도는 누구에 의해서나 이용될 수 있는 신적 에너지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신자들과 함께 거하기 위해 오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교의 의미에서 인격 안에 계실 뿐 아니라 그 마지막 분석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이며 모든 사람들은 가능성 있는 그리스도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며 영적인 훌륭한 선생이다. 그리스도 이상 혹은 영은 허큐레스(Hercules), 헐메스(Hermes), 라마(Rama), 미트라(Mithra), 크리쉬나(Krishna) 그리고 부다(Buddha) 안에 거한다. 그리스도는 단지 많은 위대한 스승 중에 하나라고 한다.
  뉴에이지에서는 예수와 그리스도를 구분한다. 예수는 단지 그리스도가 임한 그릇일 뿐이다. 스팽글러(David Spangler)는 “인간 예수는 단지 우주적 그리스도에 조율한 자이며 그리스도는 그의 세례 때 인간 예수 위에 내려왔다”고 한다. 케이시(Edger Cayce)는 “예수는 그의 나쁜 카르마(Karma)를 벗은 후에 그의 13번째 환생으로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한다. 뉴에이지의 그리스도는 영지주의의 가현설과 흡사하며, 구원론은 힌두교나 불교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 하나님의 제2의 위격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인격과 사역에서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분이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성경의 가르침이다. (골로새서 1:27-너희 안에 그리스도, 영광의 소망; 계시록 3:20-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럼에도 기독교에서 훨씬 더 지배적인 것은 ‘우리를 위하신 그리스도’의 개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드리심으로 교회를 위해 희생하셨다(롬 3:21-25; 고후 5:15-21). 이 점이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인간들 사이에 분명하게 구별되는 점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세상 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피 흘려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부활사심으로 이루어졌다. 더구나 이 역사는 특별한 장소와 시간(갈 4:4) 그리고 특별한 백성들(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예수의 역사적 죽음과 부활은 모든 시대와 모든 시간과 모든 백성을 위한 구원으로 귀결되었다. 이같은 성경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와 예수가 다른 실체가 아니며 한 인격이고 인간이 되신 하나님으로 인간과 구별되신다는 것이다.

5) 죄와 구원
  뉴에이지 운동에서는 창조에서 구별되는 초월적인 하나님이 안 계신다. 따라서 그런 초월적 존재에 반역하는 죄에 대한 개념도 없다. 또 죄의 개념이 없으므로 용서의 교리가 필요하지 않다. 죄는 단지 그 자신의 내적 가능성의 무지다.
기독교에서의 죄는 확실히 무지이긴 하지만 반역의 무지다. 창조물을 숭배하는 자, 그것을 신이라 부르는 것은 가장 나쁜 무지의 범죄다(롬 1:18-24).
그러나 뉴에이지에서 죄는 자신의 신성에 대한 무지이므로 구원은 자신의 신성의 무지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신성에 관해 계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계몽이나 의식의 변화를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는데 조율, 변화, 새로운 의식, 자기실현, 하나님 실현, 한 순간 등이다. 그리고 뉴에이지에서 구원의 마지막 국면은 환생이며, 이를 통해서 하나님과 연합하게 된다고 한다. 뉴에이지는 모든 인간이 다양한 육체적 윤회를 통해 궁극적인 실재인 일자와 하나됨으로 구원받게 된다고 한가. 그것이 우주의 운명이며 다른 길을 없다고 한다. 악에 대한 심판이나 선을 위한 보상은 보상은 윤회와 더불어 발생하며 일자에 흡수되기 전에 일어난다.29)
사람의 내적 가능성에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성경은 분명하게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고
말씀한다(롬 3:2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죄를 위한 속죄에 필수적이다. 구원은 내가 하나님인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인임을 아는 것이며, 의식의 변화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 된다.

6) 죽음
  오늘날 무종교적인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은 죽음을 종말 혹은 생명의 중지로 생각한다. 생명 너머에는 생명이 없다. 또 죽음 후에 만나게 될 초월적인 창조자는 없다. 뉴에이지에서 죽음은 현재의 생이 생물학적 으로 정지하는 것이며, 환영이며 재생이나 환생에서 다음 생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디딤돌일 뿐이라고 한다.
이런 견해와는 반대로 기독교에는 죽음에 관한 교리가 있다. 죽음은 몸에서 영이 분리됨이며, 하나님과 하늘에서 영원한 영광의 상태로 가는 것이거나 하나님이 없는 지옥에서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어느 곳으로 가는지는 세례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역사를 통해서 중생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요 3:1-18).

7) 그리스도의 재림
  뉴에이지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 아래 두 가지 중 하나의 견해를 취한다.
  ⑴ 마이트레야(Maitreya)
   크렘(Benjamin Creme)같은 사람은 단 한 번의 재림을 믿는데 뉴에이지에서 주로 지도력을 행사하게 될 인물은 마이트레야라고 한다. 크렘은 1977년 이래로 세계를 여행하며 임박한 그리스도로의 출현을 선포했다. 마이트레야는 인류의 영적 진화를 이끄는 높이 승천한 스승들의 그룹인 행성의 계급 조직체의 지도자가 된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인간의 냉담함, 마이트레야에 관한 보도에서 미디어의 무관심이 그의 출현을 지연시키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재림은 곧 있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⑵ 재림은 모든 인류 안에서 우주적 그리스도의 집단적 화신(Incarnation)이다.
  스팽글러(Spangler)는 재림은 제 각각의 종교를 가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내면과 서로에게 있는 영적인 존재를 깨달음으로써 그들의 마음과 정신 안에서 지금 이 시간에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재림은 집단적으로 오며, 이는 의식적 수준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물질적인 사건과는 상관이 없다고 한다.
우선 뉴에이저들은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재림론을 주장하고 있지만 불분명한 계시에 근거한다. 성경은 하늘로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재림 때 다시 오신다고 한다(행 1:1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사람이 볼수 있게 승천과 같은 방법으로 오시지 은밀하게 오시지 않는다.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 시간은 아무도 모르며 아버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다(마 24:36). 거짓 그리스도나 재림주 그리고 재림 날짜에 대한 예언들은 뉴에이지만의 문제는 아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이단 종파가 범하는 잘못이기도 하다.

8) 종말
  임박한 유토피아는 물병좌 사이와 지금 여기에 있다고 선언하는 자들에게 공통된 주제다. 그 시간은 지구의 기근, 핵 전쟁의 위협, 환경의 파괴, 마약, 에이즈, 범죄 등이 끝나게 되는 때이며 뉴에이지가 온전히 실현될 것이다.
기독교도 장래 유토피아의 영원한 소망을 지니고 있다.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말씀한다(계 21:1). 그때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게 될 것인데,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겠고, 슬픔과 탄식은 사라질 것이다(사 35:10). 신약은 하나님 자신이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가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더 이상 죽음이나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나 고통이 없을 것은 옛 질서(모든)가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계 21:3-4). 그러나 장래에 관한 관점에 있어서는 하나의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뉴에이지는 유토피아의 성취가 인간이 노력한 결과다. 그러나 기독교의 지속적인 유토피아는 하나님에 의해서 회복될 때만 올 수 있다. 평화의 시대는 평화의 왕자의 오심을 알림으로 시작된다(사 9:6). 인간이 주도하는 유토피아의 노력은 모두 실패했고 실패하게 될 것이다.
물론 기독교에서도 복음 증거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으로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들어 갈 책임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지며 하나님을 반역하는 악으로 치닫고 있다. 따라서 이런 죄의 관영은 마침내 주님이 오셔서 심판하심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세계가 올 것이다.
8. 뉴에이지와 연관이 있는 신앙과 관행들
6.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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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춘웅 목사[Rev. David S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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