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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초대 한국 교회의 이단 운동
RevSuh  2023-04-14 22:37:57 hit: 134

6. 초대 한국 교회의 이단 운동

  황국주는 백일기도를 통해 묵시를 받고 예수께서 자기 안에 사신다며 머리를 길러 내리고 수염을 길러 그 풍채를 예수의 모습처럼 꾸미고 자신의 목이 잘리고 예수의 목이 그 위에 붙었다고 하는 황당한 망언을 난발했다. 목가름, 피가름의 빙자였다. 그가 서울을 향해 온다는 소식에 예수의 화신을 구경하고자 운집한 군상이 길을 메웠으며, 가정을 버리고 따르는 유부녀들과 수종드는 처녀 등등 육십여 명의 일행이 서울에 입성할 때는 전국 교회가 떠들썩했다.
  그는 삼각산에 기도원을 세우고 목가름이나 피가름을 교리나 실제로 가르쳤으며, 이 가름의 과정을 영체 교환으로 실천했는데, 이것은 일종의 혼음이었다.
  그는 자신은 완전자이기 때문에 죄를 범할 수 없다고 호언했다. 평안도 안주노회가 조사단을 파견하여 혼음 문제를 따져 묻자 자신들은 요단강을 건너와서 남녀 간의 성 문제를 초월했다고 호언했다. 그러나 황국주는 결국 운산의 한 유치원 보모와 큰 죄를 범하고 삼십육계를 치고 말았다.
  황국주는 1933년 안주 노회와 평양노회에 의해 위험한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며, 부흥회 초빙을 금지시켰고, 같은 해 가을의 총회도 이 사실을 확인했다. 황국주는 극단적인 신비주의자로 직통 계시와 자신을 신격화한 신인합일주의의 사이비 이단이었다. 그의 사상은 후에 통일교의 문선명과 전도관의 박태선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1) 이용도의 신비주의
  이용도는 1900년 4월 6일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에 소장수 대주가 아버지 이덕흥과 시변리교회 전도 부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도 부인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신앙을 접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1909년 토산한영지서원을 졸업하고  1914년에 시변리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5세 때 송도한영서원 고등부에 진학하여 7년 후인 1922년 졸업했다. 그리고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2개월, 1920년 2월에는 기원절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1921년에는 불온 문서 사건으로 6개월, 1922년에는 태평양회의 사건으로 2년, 모두 4차례에 걸쳐 3년여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다.
  1925년 겨울 그는 폐병 3기의 위중한 상태로 요양차 강동으로 내려갔다가 그 곳에서 부흥회 인도 요청을 받았다. 그가 강단에 섰을 때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고, 그를 본 성도들도 같이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홍수를 이루는 집회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직접 가슴에 와닿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 경험 후에 그는 건강을 회복하고 신학교에 복학하고 졸업했다고 한다.
  1928년에 신학교를 졸업한 이용도는 강원도 홍천읍교회에 파송받았다. 그해 12월 24일 홍천읍교회 새벽기도회 도중 귀신을 추방하는 신비적인 체험을 경험한 이후 변화를 받고 능력 있는 설교가요 부흥사로 거듭났다. 그는 기성교회를 불신하고 선교의 길을 나서기로 한 후 교파를 초월하여 부흥회를 했다. 평양 산정현교회 부흥회에서는 불을 끄고 기도하며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하기도 했는데 이때부터 안수는 부흥회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용도의 부흥회는 인간적인 책임의 강조, 안수 같은 새로운 방식 및 기성교회의 냉랭함 비판 등으로 점차 신비주의화되고, 교계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장로교 황해노회는 여신도와의 서신교환, 소통 기도, 기성 교회 교역자 공격, 무교회주의자라는 이유를 들어 그에게 금족령을 내렸다.
  1932년 평양노회에서는 타 교파 강사를 집회에 청할 때는 규정된 수속을 취할 것, 조용히 기도하고 떠들지 말 것, 무인가 단체를 해산할 것 등의 지침을 산하 교회에 하달했다.
  1933년 봄 감리교 중부연회에서 휴직 처분을 당한 이용도는 원산에 가서 2개월 남짓 정양하다 그해 10월 2일 33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장로교회 길선주 목사의 부흥회는 철저한 성경 공부에 기초하고 있었고,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는 신유의 이적 역사에 기초하고 있었다면, 이용도 목사의 부흥회는 이 목사 개인의 영적 체험에 근거한 신비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용도의 신비주의는 무엇이 문제였나?
  원산 감리교회 유명화는 예수가 자기에게 임재해 있다고 주장하면서 예수 같은 모양을 하고 다른 여자들에게 강신극을 벌이며 입신하고 예언했다. 그 유명화와 함께 한 자들이 있었는데 원산 소학산의 백남주, 한명준 등이었다. 이들은 스웨덴의 신비주의자 스웨덴벌그(Emonuel Swedenborg)의 책을 읽고 감동 받아 그 이론에 따라 신비주의에 젖었다.
  이용도는 이들과 교류를 갖게 되었고, 1932년 가을 7-8명의 남녀와 함께 기도회를 갖게 되었다. 그때 유명화가 “용도야, 너는 주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좀더 충성하고 좀더 고생을 당하거라”는 예언을 했다. 그의 예언에 이용도는 울며 기도하고 회개했다고 한다. 유명화는 그에게 “너는 무병하다가 73세를 너와 함께하리라. 너는 내 교회를 따로 세워라”고도 했고, “네가 가르치는 아가서는 성서가 아니고 연애물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접신자 유명화의 말을 주님의 말씀으로 오인하여 믿은 이용도의 행위에 대해 김인서는 무지한 것, 무모하고 암매한 것이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이용도의 말년은 정신적 건강에 회의를 품을 정도였다. 1932년 평양에서 한준명이 강신극을 자행하여 교회의 질타를 받을 때, 이용도는 그를 옹호하는 글을 쓰면서 “그리스도는 어디에나 내재하고 계시기 때문에 악인에 접했다 하야, 혹은 내 경험과 다르다 하야, 즉 죄인으로서 버림받았다 하야 그를 책벌하고 쫓아낼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민경배는 그의 무차별적인 사랑으로 그의 피습감이 피해 동류의식으로 경화되었다고 지적했다.

2) 이용도의 신학 어떤 내용인가?
  ⑴ 고난의 예수
  "나는 주의 사랑에 삼키운 바 되고 주는 나의 신앙에 삼키운 바 되는 이 합일의 원리여, 오, 나의 눈아, 주를 바라보라,“ 요한복음을 좋아했던 그는 33세의 한창 청년인 예수는 불쌍하게도 사형을 당하셨습니다. 갖은 수치와 욕을 다 당하셨습니다...... 전신의 피를 다 쏟아 부었습니다”라고 했다. 예수는 고난받으시고 수치를 당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민경배는 “이용도의 기독론은 인간이 되신 예수의 십자가 고난만 보고 부활과 승천의 영광은 보지 못한다. 그에게는 낮아지신 그리스도만 있고 높아지신 그리스도는 없다. 그리고 낮아지신 십자가, 죄에 죽으신 예수! 그 예수에 대한 측은하고 불쌍히 여기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 그에게는 십자가의 앞도 뒤도 없으며 부활이 없다. 사랑과 아픔만 있지, 그것이 구속론적으로 설명한 부활의 신앙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용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하나님의 아들 성자로서 삼위의 제2위이신 하나님에 대한 바른 기독관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십자가만 있고 부활이 없는 절반의 복음만을 믿고 전한 셈이며, 그것은 온전한 복음이 아니었다.

⑵ 신비주의
  이용도의 신비주의는 예수에 대한 사랑이 압도적이다. “부하거나 죽거나 사랑할 이는 예수뿐이다.”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만을 소유하도록 다만 그를 구할 것이라고 한다. 주를 사모함에 대한 표현이 성애적인 요소로 나타난다. “주의 입술에 그대는 입 맞추라.” “옷을 벗고......그런 것들이 당신과 나 사이를 막을 것입니다.....당신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안 들릴 것입니다.” “당신의 손이 나를 만지매 내 가슴도 기쁨으로 형용할 수 없는 소리를 발하옵니다.” “사랑의 유방”,.....“주는 신랑, 나는 신부, 주여, 침방에서 사귀는 사랑의 사귐의 때를 허락하소서.” “나는 다만 골고다로만 주의 뒤를 따라갑니다....주께서 우시매 나도 그 눈물의 자취를 따라갑니다.” 이에 대해 민경배는 그는 실제로 그리스도와 합일되기를 소원했으며, 그리스도는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분이기에 결국 자신을 고난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실제로 자신의 고난을 “골고다의 길이 나의 길”이라 하였고, “예수의 아픔이 그대로 복사된 내 마음이 심히 민망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이용도는 자기가 곧 구주 자신임을 넌지시 비치는 말을 하고 있다.
  이용도에게 있어서 신앙은 고난 받으신 예수요, 그의 신앙의 완성의 목표는 그와 합일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부흥회나 전도 집회 그리고 설교의 핵심에는 복음이 있었다고 하기가 어렵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아닌가?
  민경배는 “한 사람 예수에 대한 애모가 전혀 삼위일체론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보내신 하나님과 보내심을 받은 성자의 구속사적 연관이 전혀 없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죽은 예수 외에는 성부가 들어와 차지할 여지가 전혀 없고, 그래서 선교의 부재를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이용도의 부흥회 설교는 근본적으로 설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용도 목사의 문제는 성경 말씀보다 자신의 경험을 중시하고 기성 교회를 은혜가 없고, 냉랭하다고 비판함으로써 영적인 교만에 빠졌고, 객관적인 교리로 사이비 신비주의나 이단을 비판하는 대신 무분별한 사랑으로 포용, 교제함으로써 한 동류가 되고 말았다. 신관, 성경관, 교회관에 대한 지식이 크게 부족함을 엿볼 수 있는데, 그 이유로는 그의 신비주의적인 신앙관에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신학적인 교육과 훈련의 결여에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이익관은 “이용도는 신학을 전공하지 못하였다. 그는 또 신학생 시절 매일같이 잡지, 소설, 시가, 법률, 정치 등과 관계된 서적을 탐독할 뿐 신학에 대한 관심은 전혀 갖지 않았다”고 하였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이용도의 신비주의에 대한 집착과 설교와 서신 등에서 나타나는 문학적인 세밀한 감정 표현의 기교에 대한 어떤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김교신은 이용도와 전혀 다른 특성의 신앙을 지녔으면서 예찬도 받았지만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는 일제의 회유와 압력으로 한국 교회가 흔들리던 때에도 민족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 준 인물로 평가된다.
  김교신은 1901년 함남 함흥에서 태어났다. 함흥 공립보통학교(1916)와 함흥 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1919),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동경 정칙영어학교에서 공부했다. 1920년 4월 14일 밤 동경 시내를 지나다 동양선교회 성서학원생 송전(松田)의 노방전도 설교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동경의 한 성결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시미즈 순조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 교회에서 담임 목사가 쫓겨나는 것을 목격하며 실망하여 신앙 생활에 위기를 만난 후 기성 교회에 회의를 느껴 우찌무라 간조의 문하에 들어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동경 정칙영어학교를 졸업했으며, 1922년 4월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영어과에 입학했다가 지리박물과로 전과한 후 마지막으로 1927년 3월 동경교사이과 제3부갑조를 졸업했다.
  그에게 7년 이상 크게 무교회주의 영향을 주었던 우찌무라 간조는 미국 유학을 하고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다가 천황숭배를 반대하는 불경사건으로 교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만조보의 기자가 되었고, 동시에 ⌜성서지연구⌟(1900-1930)를 간행하며 자신의 가정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거나 집회를 열기도 했다. 우찌무라의 탁월한 성경 해석과 일관된 애국주의 사상은 김교신의 사역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찌무라에게서 애국 사상에 대한 사명감을 갖게 된 김교신은 귀국하여 우찌무라의 문하생 함석헌 등과 함께 ⌜성서 조선⌟을 창간했다. ⌜성서 조선⌟을 통해 성서보다 예배당을 중시하는 기성 교회를 반대하고 조선 토착의 기독교 신앙을 추구하려 했다.  

4) 김교신의 신학 사상
  김교신은 기성 교회를 거부하는 무교회주의자로 그의 입지를 세워 나갔다. 그는 눈으로 보이는 회당을 진정한 교회로 여기지 않았고, 신자가 모이는 예배 장소 자체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성직 제도에서 비롯된 갖가지 교회가 가진 권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로, 집사 등의 직분에 의한 신자들의 조직도 무시했고, 교회가 가지고 있는 성서해석권을 인정하지 않고 신자 각자가 성서를 통해 직접 하나님과 만나 은혜의 분수대로 신앙의 진리를 깨우침 받는 만인 제사장의 입장을 존중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또 선교사의 재정에 의지하는 의존적 교회 기구를 거부했으며 민족이 주체가 되는 독립적, 토착적 신앙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다.
  김교신의 민족주의적 색체가 뚜렷했던 ⌜성서 조선⌟은 내용의 삭제, 발행 중지 등의 박해를 받다가 1942년 3월에 ‘조와’라는 권두언이 문제가 되어 폐간되고 말았다. 함께 ⌜성서 조선⌟을 이끌었던 함석헌, 유달영과 함께 1년 간 옥고를 치르고 난 김교신은 1944년 함흥 질소회사에 입사하여 노무자들을 위해 애쓰다가 해방을 눈앞에 둔 1945년 4월에 4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김교신의 문제는 그가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성 교회를 비판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간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목사가 아니었고, 목회를 해 보지도 않았으므로 자신의 이상에 따른 신앙과 신학을 펴나가기가 쉬웠을지 모른다. 따라서 그는 자신과 같은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기독교, 그리고 당시의 반 외세, 반 선교사의 경향에 편승하는 민족적 기독교를 주창하게 되었다.
  그의 무교회주의는 교회관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교회란 신자들의 모임이고, 그 모임은 장소가 필요하며, 그 곳이 교회인데, 눈에 보이는 건물(회당)을 진정한 교회로 보지 않았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신자가 모이고 예배를 드리면 그 자체가 벌써 교회가 아닌가?
  더구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는 성서만의 기독교를 주창하면서도 성서 전체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려 하거나 신구약 전체의 일관된 성경 신학의 맥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성서제일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구약은 유대교의 경전이요 기독교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며 신약만을 취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절하시키고 말았다.
  결국 박형룡의 평가처럼 이용도의 신비주의가 감성적인 기독교의 극단으로 흐르고 말았다면,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는 지성만의 기독교라는 다른 극단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총체적인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경험에 토대를 구축하고 있었다.
  박용규는 김교신이 기성교회가 갖기 쉬운 지나친 교권주의, 물량주의를 경계하고 순수한 조선의 기독교를 주창했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교회 자체를 거부한 점,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인 한 주님,  한 세례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비판을 자초했다고 보았다.
  선교사 주도의 교회와 일제하의 제도적인 기독교의 교권주의와 물량주의를 제거하고 순수한 조선 기독교를 세우려는 김교신의 열정과 의지는 신학적인 훈련부재와 목회 현장의 경험 부족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는 진정한 교회의 개혁은 교회 밖에서 이상적인 이론을 구축하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었다. 더 나아가 성경에 충실하려면 성경신학은 물론이고 조직신학과 교회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절대로 필요하며 성경의 해석은 해석자의 주관이나 선호하는 신학 사상의 영향만 받아서는 올바른 해석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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