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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초대 한국 교회의 분파 운동
RevSuh  2023-03-01 20:55:15 hit: 211

5. 초대 한국 교회의 분파 운동


1) 최중진의 자유교
  최중진은 1909년 평양신학교 제2회 졸업생으로 선교사를 반대하는 기치를 내걸고 1910년 자유교(自由敎)를 설립했다. 군산 지방으로 편입된 부안 지방을 자신의 지역으로 돌려 줄 것, 중등학교를 세워 줄 것, 집 한 채를 사 주어 선교사업에 재정적인 어려움이 없게 해 줄 것 등 다섯 가지 요구 사항을 요구했으나, 전라대리회에서 그의 요구를 거부할 뿐 아니라 그의 잘못된 요구를 사과하라고 하자 이에 반박하여 자유교회를 세웠다. 자유교는, 부안 정읍 임실 제군의 교회가 부화해서 큰 소동을 일으키자 전북 대리회와 이어서 노회가 그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 세력은 1911년 평북 대리회 지역, 특히 의주까지 확산되었다. 그러나 전북대리회는 자유교가 스스로 없어졌다고 보도했다.  
  최중진의 문제는 반 선교사 정서에서 비롯된 분리 분파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박용규는 ⑴ 자유교의 급속한 확산 ⑵ 선교사들의 치리를 거부하고 장로회 정치에 불복한 점 그리고 ⑶ 교회의 피해가 컸던 것을 그 원인으로 지적했다.
  최중진의 반 선교사 기치는 선교사들의 치리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그런 행동은 초창기 교회뿐만 아니라 일본의 침략과 맞물려 나라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 것이다.

2) 이만집의 자치교
  최중진과 더불어 반 선교사 기치를 내건 교회가 또 있었다. 이만집의 자치교(自治敎)가 그것이다. 이만집 역시 평양 신학교를 졸업했다. 이만집은 선교사 아담스(James Edward Adams)의 전도로 예수를 믿었으며,  신학을 하기 전 어드만(Walter C. Eerdmans)과 함께 교회도 섬기고 장로와 순회 조사로 섬기다가 선교사의 추천으로 평양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대구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 투옥되어 3년 옥살이를 했으며, 출옥 얼마 후 지나지 않아서 자치교를 설립했다.
  그러면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선교사와 함께 교회를 섬겼고 선교사의 추천으로 평양신학교에 들어가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은 그가 반 선교사 기치를 든 이유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그 이유로 지목될 만한 몇 가지 사건들이 있었다.
첫째로, 계성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 사건과 남성정교회와 남산교회 당회가 이 문제를 다루어 책벌을 했고 책벌 받은 당사자들이 당회 결정에 대해 노회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남성정교회와 노회가 심각한 대립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노회를 주도하는 선교사파와 이만집 사이에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으며 노회에 의해 이만집이 목사의 정직을 받게 되자 노회를 탈퇴하고 자치교회를 세우게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이만집의 자치교는 그 교회의 이름이 암시하듯 선교사 주도의 노회에서 정직 처분을 받는 등 교회와 노회 간의 불화로 인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교회의 분리와 노회 치리의 불복한 점 등은 넓은 의미에서 분파와 분열의 이단적인 요인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1923년 3월 18일 이만집과 박영조가 경북노회를 탈퇴하고 자치 선언을 하자 노회는 곧이어 이들을 제명 조치했다. 이만집의 자치교는 그의 3.1운동 주도나 선교사들이 주도했던 당시 노회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한국 교회 최초의 토착화 신앙 운동이었을수도 있다. 그러나 이만집 자신은 물론 한국 정통 장로교회 어느 쪽도 준비된 상태가 아니었다. 따라서 이만집의 자치교 설립은 상회의 치리에 대한 반발로 생긴 분파운동으로 교회연합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3) 김장호의 조선 기독교회
김장호는 1905년 북장로교 선교사 쿤스(Edwinwale Koons, 1880-1947)에게 세례를 받고 4년 후 평양신학교에 입학해서 1914년 7회로 졸업하고 황해노회에서 파송받아 황해도 봉산군 산수면 신원교회를 담임했다.  
그 후 그는 사리원 남쪽 홍수원교회를 담임하면서 자유주의 사상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소속 황해노회에서 몇몇 위원을 파송하여 자숙할 것을 권고했으나 김장호가 묵살하자, 1916년 6월 30일에 모인 제10회 황해노회는 그의 총대권을 박탈했다. 김장호가 그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고 자유주의적 성경 해석을 계속 하자 황해노회는 그를 6개월간 휴직시켰다.
  그러나 그가 노회 처분에 불복하고 총회에 항소하자 1918년 12월 6일에 모인 황해노회는 그를 목사직으로부터 면직시키고 노회에서 제명했다.
  김장호의 자유주의적인 성경 해석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현대과학과 상치되는 성경에 있는 초자연적 기사들을 하나님의 섭리로 해석하던 전통적인 입장을 떠나 모두 자연적인 현상으로 해석했다.
  그는 모세의 홍해 도하 기사를 기적이 아니라 밀물과 썰물의 간만의 차에서 생긴 현상으로 물이 갈라져 건넜다고 했다. 오병이어의 기적 역시 실제로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고 12 광주리가 남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준비해 온 도시락으로 나눠 먹은 것이라고 하였다. 또 예수께서 바다위를 걸으신 사건도 실제가 아니라 육지 가까운 해변의 얕은 바닷가를 걸으신 것에 불과한데 마치 깊은 물위를 걸은 것처럼 비춰진 것이라고 하였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재림은 실제로 미래 역사 속에서 진행될 사건이 아니며 부활도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고 했다.
  김장호의 성경 해석은 철저하게 이성적이요, 성경의 말씀보다는 과학적인 입장이었다. 마치 그는 이신론자들의 입장을 그대로 채택한 것 같았다.
  이런 김장호의 자유주의적인 신학 사상은 윌리암 커(공위량 William C. Kerr) 선교사의 영향 때문이었다. 윌리암 커는 이 사건 때문에 황해노회의 요청에 의해 추방되었다.
  공위량 선교사는 북장로교 선교사로 북장로교 총회의 다섯 가지 근본 진리 천명에 반기를 들고 1924년 미국 북장로교 소속의 진보적인 목회자들이 어번 신학교에 모여 어번 선언(Auborn Affirmation)을 발표했을 때 모인 1,293명의 서명자 중 한 사람이었다.
  김장호는 1918년 7월 21일 서양인의 세력을 떠나 행복을 위하여 조선기독교회를 조직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설립 목적은 다음과 같다고 했다.
⑴ 조선 백성의 영혼 구제 사업을 당사자인 조선 백성의 능력과 책임 아래서 운영하고, 조선의 주권과 이익을 외국의 주권이나 이익보다 소중히 여기면서 운영하기 위해서이다.
⑵ 각국 각파의 선교사가 들어와서 제각기 제 교파 세력을 증강하느라고 분쟁이 벌어져서 민족을 분열, 이  간한다. 이 폐단을 막고 우리나라 사람끼리 교파를 세워 민족 정신을 통일하기 위해서이다.
⑶ 과학은 진보하고 지식은 넓어진다. 과학이 증거하는 종교와 과학을 뒷받침하는 종교를 가지기 위해서이다.
  조선기독교회의 창립 목적은 선교사의 영향력을 벗어나 자치자립의 민족적인 교회를 이루어 주권과 이익을 도모하겠다는 것이며, 과학에 일치하는 기독교회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선교사에게 배워 목사가 된 사람이 반 선교사 기차를 든 것은 당시 상황을 고려한다고 해도 배은의 행위였다. 게다가 보수적이고 정통적인 신학을 배운 그가 그 신학을 포기하고 진보적인 선교사의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 성경관을 가지고 교인들을 가르친 것은 반 선교사 기치와 모순되기까지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경의 초자연적인 사실을 모두 자연적으로 해석한다면 복음 자체를 부인할 수밖에 없으며, 복음이 없는 교회는 생명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당시에 조선기독교회의 교세는 교회수 30개 소, 교인 수 남녀 2,471명이었고, 교역자 수는 41명이었다. 그러나 조선기독교회는 친일적인 색채를 띠게 되면서 일제의 물질적, 정신적 지원으로 길어야 반년이나 1년 정도 지속하리라는 예측을 깨고 2주년을 맞으면서 ⌜조선 기독교소사⌟를 간행할 수 있었다.
  김장호는 당시 유사한 종파들과 연합을 시도하여 충북 충주의 조선야소교회와 정식으로 합동하고, 1935년 창설한 만주의 감리교계 분립 종파 조선기독교회와도 관계하면서 1938년 현성환이 세운 길림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연합한 일도 있었다. 이 신학교는 이용도(1901-1933)의 예수교회와도 연계되어 있었다.
김장호의 조선기독교회는 반 선교사적 민족주의 교회를 지향했던 최초의 운동이었으나, 그의 사상은 자유주의의 영향을 그대로 유지하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교회적으로 정치적인 독립운동이었으나 사상적으로는 오히려 예속 운동이 되고 말았다. 또 그는 선교사 배격 운동을 전개하면서 3.1독립 만세 운동을 서양 의존운동으로 보고 일본의 정책에 협력함으로써 민족주의 교회를 표방했으나 일본에 협력함으로써 오히려 정치적으로는 일본에 예속하는 경향을 보였다.

4) 최태용의 복음교회
  무교회주의자였던 최태용은 1935년 12월 말 복음교회를 창설했다. 그는 윤치병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기독교 조선복음교회를 창립한 후에 기독교 조선복음교회 감독 겸 경성교회 당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1919년부터 약 2년 간 연희전문학교에서 농과 선생으로 재직하다 1920년 가을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 우찌무라 간조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1924년 고국에 돌아온 최태용은 ⌜신생명⌟이라는 잡지에 투고하다가 1925년 6월 10일 ⌜천래지성⌟이란 잡지를 창간했다.
  유형 교회를 철저하게 거부하면서 복음을 강조하는 무교회 사상을 지닌 그가 복음교회를 창설함으로써 교회주의자로 변신했다. 그러나 그는 제도적인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목사 안수를 한 개인 윤치병으로부터 받은 일, 그리고 복음교회의 감독과 당회장이 된 것 때문에 반쪽의 교회주의자로 지목받는다.
  그의 신학 사상은 복음을 강조하지만, 박형룡이 지적한 대로 로고스가 성육신할 때 신속을 포기하고 순육으로 돌변했다고 주장했다. 신성을 포기하지 않고 인성을 입으신 신인성의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이다. 따라서 박형룡은 사모사타 바울을 비롯한 역동적 단일신론자들이 주창하는 이론을 따랐다고 했다.
  최태용의 복음교회는 교회론에 문제가 있었을 뿐 아니라 신학적으로 기독론에서 문제가 있었던 불건전한 운동이었다. 최대용은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양성을 부인하고 인성만을 주장함으로써 삼위일체의 하나님뿜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이나 부활의 복음을 모두 부인한 셈이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 교회 최초의 이단적인 신학 사상을 지닌 자였다고 하겠다.
6. 초대 한국 교회의 이단 운동
4. 한국 교회 이단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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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춘웅 목사[Rev. David S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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