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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이

 

 

 

 


성령과 그리스도의 관계
RevSuh  2010-04-26 18:51:19 hit: 2,376

성령과 그리스도의 관계

이사야는 성령이 메시야에게 임하시어(사 42:1) 그의 사역에 지혜와 강함과 지식을 주실 것을 예언했다(11:2-3). 복음서는 그 예언이 실제로 이루어져 그리스도의 사역에 성령의 능력이 지속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셨다는 사실은 삼위 하나님의 연합을 강조한다(참고, 요 5:31-44; 6:29; 8:19; 10:37-38).

동정녀 탄생
행위자
  마태와 누가는 마리아의 잉태에서 성령의 사역을 강조한다. 마태복음 1:20은 마리아가 잉태한 아이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그 기원을 강조하였다. 누가복음 1:35은 위에 오셨다; 덮는다는 말을 씀으로 마리아를 잉태케 한 성령의 사역을 묘사해 주고 있다. 같은 말 위에 오시다는 말(eperchomai)은 오순절 사도들 위에 성령의 임하심에 사용되었다(행 1:8). 이 말은 설교를 위한 완곡어법으로 의도된 것이라는 가능성은 없다. 덮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이 마리아 위에 머물러 있으므로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실 아기를 낳았음을 암시한다. 이 복음서의 강조점은 예수님은 인간이 아버지가 없었으며, 요셉은 예수님을 낳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정녀탄생의 결과
1) 그리스도의 인성이 존재케 되었다. 존재케 된 이는 한 인격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서 영원부터 한 인격으로 존재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성은 마리아의 자궁에서 시작하였다.
2) 그리스도의 인성은 죄가 없으시다. 비록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성을 지니셨지만 그 인성은 죄로 얼룩지지 않았다. 비록 그는 인간 어머니에게서 낳으셨지만 성령으로 인한 잉태는 그리스도의 무죄하심을 보장하였다. 이것이 왜 동정녀 탄생이 중요한지의 이유이다. 만일 예수님이 죄있는 인간 아버지에 의해 탄생되셨다면 그는 하나님이 실수도 없으실 뿐 아니라 죄인의 구주가 되실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무죄함에 대한 증거는 그리스도가 자신을 위해 주장하신 것이 그 증거이다. 그에게는 불의함이 없으시다(요 7:18). 사도는 그 안에는 죄가 없다고 하였다(요일 3:5).
3) 그리스도의 인성은 인간의 제한을 초래하였다. 비록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지만 동정녀 탄생은 참으로 인간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피곤하셨다(요 4:6); 그는 목마르셨다(요 4:7); 그는 주무셨다(마 8:24); 그는 우셨다(요 11:35). 그는 자원하여 인간의 제한에 복종하셨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
성령은 그리스도를 기름부으셨다
누가복음 4:18은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기름부음 되었음을 가리키는데 이는 아마도 그의 세례에서 그리스도에게 성령이 보이게 임하셨을 때 발생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위에 성령의 임하심은 이사야 61:1의 예언의 성취이다. 왕들이 기름부음을 받았고(삼하 2:4) 제사장들이 기름부음을 받은 것(출 28:4)과 꼭같이 메시야는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기름부음의 행위는 성령을 능력을 수여하는 것으로 이 경우에 성령님은 그 자신이 사역을 위해 그리스도를 기름부으시고 능력을 주셨을 것이다.

1) 기름부음은 이스라엘의 메시야나 왕으로 예수님을 명시한다. 요한복음 1:31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그의 세례때 그 민족에게 나타낸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구약의 왕들의 방식으로 한 것이다(참고, 삼상 16:6-13).
2) 기름부음은 예수님을 그의 공생애 사역으로 소개하였다(행 10:38). 세례후에 예수님은 그의 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사역을 시작하셨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야로 그의 사역으로 성별하였다. 기름부음은 예수님의 인성 때문에 필요했으며 역시 삼위의 연합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3) 기름부음은 예수님께 그의 공생애를 위한 능력을 부여했다(눅 4:18). 비록 예수님은 그 자신안에 기적을 행하실 능력이 있으셨지만 사역을 위해 성령의 능력을 받으심으로 삼위안에서 연합과 다른 위격에 의존을 드러내신 것이다.
4) 기름부음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신성을 증명했다. 그리스도의 세례에서 아버지는 그 민족에 메시야로 눈에 보이게 일치하셨으며 백성들은 아버지의 확증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충만케 하셨다
누가복음 1:15은 선두자 세례요한이 그의 어머니의 자궁에 있을 때까지 성령으로 충만하였음을 가리킨다. 메시야는 메시야의 선구자로 최소한 같은 정도로 성령으로 충만하셨을 것은 확실하다. 누가복음 4:1에 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하시어 성령에 이끌림을 받으시었다. 그 동사는 미완료시제이므로 지속적인 행동을 암시한다. 예수님은 이제 지속적으로 성령님의 인도 아래 계셨다. 마가복음 1:12은 ‘곧 성령이 그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고 말씀하고 있다. 현재시제 재촉하다는 말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 전체 즉 그의 탄생에서 죽음과 부활때까지 성령님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지속적으로 성령이 충만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음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도 한 부분을 담당하셨다(히 9:14).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의 개념은 히브리서 저자의 생각에 특출했을 것이다. 만일 이것이 그 경우라면 이사야 42:1에 그 종위에 임하실 성령님은 역시 이사야 52:13-53:12에서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실 그 종을 인도하실 성령님이시다.

그리스도의 부활
성경의 설명은 부활의 위대한 행위에서 하나님의 각 위격에 특별한 부분이 있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셨다(엡 1:19-20; 시 16:10). 그러나 그리스도는 역시 그 자신을 살리실 능력이 있으시다(요 10:18). 성령님 역시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루는데 관여하셨다. 로마서 1:24은 그리스도는 거룩의 영에 따라 죽은 자에서 부활하심으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고 언급하였다. 이것은 성령에 대한 가능한 언급이다.
로마서 8:11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성령이나 혹은 아버지 한 분을 언급했을 것이다. 베드로전서 3:18에서는 ‘그리스도는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다’고 언급한다. 그 구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가리킬 것이다.

성령을 대적하는 죄
그 죄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다.
성령을 대적하는 죄 역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죄를 포함하고 있다. 마태복음 12:24에서 종교적인 지도자들이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하신다는 말을 듣고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그가 사단의 능력으로 그의 기적을 행하신다고 비난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대적한 그들의 죄였다. 메시야로 그를 인식하는 대신에 그들은 그가 기적을 사탄의 능력으로 행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기적을 부인하지 않았으나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 그 원천을 배척하였다. 그들은 그가 사탄의 능력으로 그의 일을 한다고 하였다.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배척은 성령을 대적한 죄의 기초였다.

그 죄는 성령을 대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주신 자(마 12:18)가 바리새인들에 의해 사탄을 통해 역사하는 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지도자들은 ‘이 사람이 귀신의 왕 바알세블에 의해서만 귀신을 쫓아냈다’(12:24)고 하였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눈으로 그의 기적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사탄에게 돌렸다. 성령을 대적한 그 죄는 마침내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역사의 증인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증거들만 배척했다면 용서받을 수 있었다(마 12:32a). 그러나 그들은 마지막 증인이신 성령의 증거를 배척하였다. 그들에게 주어질 더 이상의 증거는 없었다. 죄를 대적한 죄는 영원한 것이다(마 12:31-32). 거기에는 회개를 위한 기회가 없으며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으며 결코 용서되어질 수 없었다. 실제로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죄를 지적해 주시고 회개케 하시는 성령님을 배척하는 것이며 예수를 구주로 믿게 하시는 성령님을 거역하는 것이므로 죄용서는 물론 구원받을 수도 없게 된다.

성령의 세례 사역
성령의 세례에 관해서는 적지 않은 논쟁이 있고 그 견해도 다양하다. 그것은 물세례와의 혼란도 있다. 비록 성령세례를 언급한 많은 구전들이 있을지라도 이 구절은 물세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참고, 롬 6:4; 갈 3:27). 다른 사람들은 성령세례를 제이의 축복으로 섬김을 위한 능력주심으로나 혹은 방언으로 말함으로 그 자체를 드러낸다고 이해한다. 이런 혼란을 교회의 구별된 특성을 이해하는데 실패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순절에 교회는 탄생했고 성령께서 신자들을 세례주므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들어오게 하여 교회를 세우는 그의 사역이 시작되었다.
성령세례는 그 사역으로 성령께서 신자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며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다른 신자들과 연합시키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성령세례는 교회시대에 특별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2:13은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고 하였다. 성령의 사역은 오순절에 시작되었고 세례 사역이 아직 장래일 것을 가리키는 사도행전 1:5과 이 사역의 시작이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에 있을 것을 가리키는 사도행전 11:15과 비교함으로써 엿볼 수 있다. 세례 주는 사역은 구약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오순절에 시작된 교회시대에 유일한 것이다. 성령의 세례는 이 시대에 모든 신자들을 포함한다.
몇몇 구절에서 모두가 성령으로 세례받는다는 언급이 나온다. 고린도전서 12:13에서 모든 사람은(3절)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자들이다(5절). 그러므로 모든 신자이다. 갈라디아서 3:27-28에서 그것은 너희 모두는....그리스도안으로 세례받았으며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그들이 유대인, 헬라인, 자유인, 남자나 여자의 상관이 없었다.
성령세례는 신자를 그리스도의 몸안에서 다른 신자들과 연합하게 한다. 세례로 서로 연합하게 된 자는 유대인, 이방인, 노예, 자유인, 남자, 여자 모두 서로간에 연합되었다(고전 12:13).  역시 신자의 영적 상태는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의 세속성이 잘 알려졌음에도 모두가 포함되었다.
성령세례는 신자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한다. 그리스도로 세례받은 자(롬 6:3)는 역시 그와 연합되었다(롬 6:5). 이 진리는 성령세례를 구원에 따라오는 역사가 아님을 잘 깨닫게 해 준다.

성령의 세례는 성령으로 실행된다
성령에 의한 세례는 두 가지가 있다. 어떤 그룹은 고린도전서 12:13에 ‘한 성령으로’는 한 몸안으로에다 둔다. 그리고 사도행전 1:5에 성령으로(with)는 뒤이어 일어나는 섬김을 위한 능력의 행위로 제안한다. 그러나 같은 헬라어 전치사 ‘em’이 두 구절에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두 구절에서 사용된 같은 헬라어구에서 구별을 시도하는 것은 위험스러운 것이다.  성령은 세례의 작인이시다(행 1:5; 고전 12:13).

성령의 내주하심
요한복음 14:16에서 예수님은 성령이 신자안에 내주하실 것을 약속하셨으며 그 내주하심은 영구할 것이다. 이 영구한 성령님의 내주하심은 선택된 소수가 아니라 모든 신자를 위함이다.

성령은 선물이다.
성령님은 제한없이 예수 안에서 모든 신자에게 주어졌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제외하고는 성령의 선물에 덧붙일 조건이 없다(요 7:37-39). 많은 성경은 성령이 신자에게 주어지는 선물로 말씀한다. 준다는 말은 이 실례에서 선물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참고, 고후 1:22; 살전 4:8; 요일 4:13). 성령은 선물로 주어지기 때문에 사람은 그것을 받을 뿐이지 그 선물을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성령은 구원받을 때 주어진다
에베소서 1:13은 성령은 구원의 순간에 주어졌음을 가리킨다. 성령의 인침(내주)은 믿는 순간에 일어난다. 갈라디아 3:2은 역시 이 진리를 강조하였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불신자이다. 로마서 8:9은‘그리스도의 영을 받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았음을 강조하였다’. 유다서 19절은 불신자들은‘성령이 없는자’를 가리켰다.

성령은 육적인 신자안에 내주하신다.
육적인 고리도교인들은 근친상간하는 자요 다른 신자를 고소하는 자며 다른 죄들이 있었음에도 성령이 내주하셨다(고전 6:19). 만일 선택된 그룹에만 성령이 내주하신다면 성령께서는 고린도 교인 모두에게 내주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로마서 8:9과 고린도후서 1:22은 그들의 영적 상태에 상관없이 모든 신자는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결론을 요구한다.

성령은 영구하게 신자들안에 내주하신다.
성령님은 모든 신자안에 내주하실 뿐아니라 영속적으로 내주하신다(요 14:16). 성령은 신자에게 그들의 장래 영광의 보증인 계약금으로 주어졌다(고후 1:22; 엡 4:30).

내주하심과 연관된 문제
시편 51:11에 다윗이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한 말씀은 구약의 경륜에서 성령의 일시적 내주와 연관이 있다. 오순절후에 성령의 내주는 영구하다(요 14:16)

사도행전 5:32
베드로는 성령의 내주하심의 조건으로 순종을 입증한 것이 아니라 믿음과 동의어로 순종을 사용했다. 유사한 표현의 사도행전 6:7에서는 사용되었는데 거기서 그 의미도 믿음임을 분명히 하였다(참고, 요 3:36).

사도행전 8:14-17
위 구절에서 사마리아 인들 역시 유대인처럼 성령을 받았다. 이것은 그 시대에 일반적이 아니었다.

성령의 인치심
성령의 인침은 신자의 구원을 안전케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많은 일 중에 하나이다(참고, 고후 1:22; 엡 1:13; 4:30). 고린도후서 1:22에서 하나님은‘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다’고 하였다. 구약시대에 인은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문서를 증명한 인(예; 결혼계약); 인은 한 왕으로부터 다른 왕에게로 권세의 이동을 증명하였다; 인은 어떤 것을 안전하게 하는 잠그는 것으로 쓰였고 이혼의 증서와 같은 문서를 확인하는데 쓰였다. 성령은 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졌으며 이는 그 신자가 하나님께 속한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인침에 대한 주된 사상은 소유권에 대한 것이다. 신자는 그가 하나님께 속했음을 확인하기 위해 성령으로 인처졌다. 고린도후서 1:22은 성령자신이 인이심을 가리키는데 성령을 우리에게 주소서라는 구절은 신자에게 행해진 그 인침을 설명한다. 인침은 신자의 영화의 견지에서 볼 때 영구한 것이다(엡 4:30). 고린도후서 1:22에 보면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으로 인침이 되었음에도 성령님을 근심케 할 수 있었다(엡 4:30). 따라서 성령님의 인침은 모든 신자에게 해당된다.

성령의 은사
성령의 은사에는 두개의 개념이 포함되었다. (1) 개인에게 영적 은사는 개인의 영적 섬김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 주어지는 것이다(고전 12:11).
(2) 교회에 주시는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교화와 성숙을 위해 한 사람이 특출하게 준비되어지는 것이다(엡 4:11-13).
성령의 은사에 의한 것이 아닌 것은 (1) 섬김의 장소가 아니다. 그는 스럼가에서 일하기 위해 참 은사가 있다고 할 수 없다. 또 영적은사는 하나의 나이에 속한 그룹을 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는 고등학교 3학년생들과 일하기 위한 은사가 있다고 할 수 없다.
(2) 영적은사는 타고난 탈렌트와 같은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관계가 있을 것이지만 자연적 은사는 타고나면서 소유하는 것으로 발전하는 하나의 능력이다. 이에 비해 영적은사는 개종의 순간에 하나님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자연적 탈렌트와 영적인 은사는 아래와 같은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자연적인 능력과 영적인 능력의 비교  
비교자연적인 은사 영적인 은사
원천 부모를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옴부모에게서 독립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옴
소유된 목적출생으로부터 자연적인 수준에서 인류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아마도 개종으로부터 영적 수준에서 인류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
과정신자에 의해 그의 쓰심과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 드려져야한다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야만 한다.
           
  
은사들의 종류
사도(엡 4:11), 사도의 은사와 직분 사이에는 중요한 구분을 지어야 한다. 사도의 직분은 12사도와 바울에게 제한되었다. 누가복음 6:13에 예수님은 사도들을 자신에게로 부르셨으며 그들 중에서 12명을 선택하셨고 그가 역시 사도라고 명명하셨다.
이 열두 명에게 예수님은 특출한 권위를 주셨다. 그것은 사도의 직분을 받은 자에게 제한되었다(참고, 눅 9:1; 막 10:1). 후에 그의 사도직을 변호하면서 바울은 참 사도의 표적이 그에 의해 실행되었음을 강조하였다(고후 12:12). 사도직을 위한 자격은 사도행전 1:12-22에 설명되었다. 사도직을 받은 사람들은 요한의 세례때부터 그리스도의 승천때까지 주님과 동행하였다. 바울의 환경은 특수했다. 그는 자신을 사도로 언급했으나 때가 차지 못한 자라고 하였다(고전 15:8-9).
사도의 은사는 고린도전서 17:28과 역시 에베소서 4:11에 언급되었다. 사도라는 말은 apo(에서)와 stello(보낸다)에서 왔다. 그러므로 사도란 말은...로부터 보냄받은 자이다. 기술적 의미에서 이 말은 은사와 같이 12명에게 제한되었다. 그 의미에서 사도는 교회의 형성기에 제한된 기초적 은사였다(엡 2:20).
교회가 기초가 놓였을때 그 은사는 중지되는 것이 필요했다. 사도직이 중지된 것과 꼭같이 아무도 사도행전 1:21-22의 자격을 갖출 자는 없다. 따라서 좁은 의미에서 사도의 은사는 중지되었다.
역시 사도란 말은 그리스도를 위한 사자(messenger)나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이런 의미로의 사도는 직분이나 은사를 가리지 않았다. 사도는 사자의 비기술적인 의미로 쓰였다(참고, 행 14:14; 고후 8:23; 빌 2:25).

사도라는 말은 아래처럼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사도들은 초대교회에서 권위를 가졌던(행 15:4, 6, 22, 23) 교회의 대표였다.
2) 사도들은 표적과 기사와 기적을 행한다(고후 12:12)
3)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들이었다(고전 4:1-2; 15:5-8).
4) 사도들은 초기에만 교회에 주어졌다(엡 2:20).
5) 사도들은 바울 후에 기대하지 않았다(고전 15:8).

선지자(롬 12:6)
선지자는 (1) 신적계시를 선포했다.
          (2) 감추어진 것을 예언적으로 나타냈다.
          (3) 장래를 예언했다.
성경에는 예언이 장래사를 미리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분명한 예들이 많이 있다. 예언이 가르침(즉 하나님의 진리를 앞서 말하는)을 위한 동의어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언급은 없다.
예언의 은사는 로마서 17:6; 고린도전서 12:10 그리고 에베소서 4:11에 언급되었다. 사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통하여 그의 정보를 받았다. 그러므로 아가보는 전 세계에 닥칠 기근을 알려 주었으며(행 11:28)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잡힐 것도 예언했다(행 21:10-11). 직접 계시를 통하여 선지자는 사람이 달리는 알수 없는 신적 신비(고전 13:2)의 지식을 받았다. 정경의 완성된 후에 예언의 은사는 교회의 교화를 위해 매우 중요했다(고전 14:3).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계시를 받았고 그들의 교회 - 권면 그리고 위로(고전 14:3) - 를 위해 백성들을 가르쳤다. 그 계시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그것은 참되었다. 선지자의 참됨은 그 예언의 정확성으로 드러났다(신 18:20, 22). 예언은 이렇게 장래 사건을 미리 말하는 것을 포함하였다. 예언의 은사는 역시 교회의 기초와 연관이 있다(엡 2:20). 교회의 기초가 완성되고 성경의 정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예언의 은사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기적(고전 12:10)
성경의 기적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세 개의 중요한 시기에 발생하였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 그리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였다. 성경에는 그 시기의 범위밖에서도 기적이 있지만 그리 많지가 않다. 기적은 메시지를 보증하기 위해 주어졌으며 위에 언급된 시기들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전한 새로운 메시지를 입증하기 위해 비상한 기적들을 행하도록 그의 사자들을 능력이 있게 하시었다.
신약시대에 발생한 기적들은 사도들이 전한 새로운 메시지를 유효케 하였다. 성경의 정경이 완성되면서 유효하게 하는 표적으로서 기적의 필요는 사라졌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사자의 말씀을 유효케 하는데 충분하기 때문이다.
기적의 은사(고전 12:10, 28)는 치유의 은사보다 광대한 은사이다. 기적이란 말은 능력이나 능력의 사역을 의미한다. 기적의 실행에 대한 예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대한 베드로의 심판이다(행 5:9-11).  또 바울은 눈먼 마술사 엘리마를 심판하였다(행 13:8-11). 기적은 역시 그리스도의 기적을 묘사하는데 쓰였다(마 11:20, 21, 23; 13:54).
기적과 기적의 은사 사이에는 구분이 있어야 한다. 비록 기적의 은사 - 기적을 행사하는 개인의 능력 - 은 사도들의 시대로 중지되었다. 이 말은 오늘은 기적을 행할 수 없거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기도에 직접 응답하시며 그의 삶속에서 기적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죽음을 앞둔 병자를 기도의 응답으로 치유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기적의 은사자를 통해서 하시지는 않는다.

치유(고전 12:9)
기적의 은사에 관한 좁은 국면이 치유의 은사이다(고전 12:9, 28, 30). 이 말은 복수로 쓰였다(헬라어 iamaton: 치유들). 고린도전서 12:9은 병든 자의 다른 등급이 치유되는 것을 암시한다. 치유의 은사는 질병의 모든 형태의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는 사람의 능력을 포함하였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의한 신약의 치유에 대한 은사는 가치있는 일이다. 이런 치유는 즉각적이며(막 1:42); 완전하였다(마 14:36). 또 영구적이었으며(마 14:36) 제한적이었다(체질의 질병 예, 나병, 막 1:40 이었지 심리적인 질병이 아님); 역시 무조건적이었으며(믿음을 행하지 않은 불신자를 포함했으며 심지어 예수님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요 9:25); 목적이 있었다(사람들, 그들의 고통과 병에서 구하는 목적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시골의 외진 곳을 위해 환자가 치유를 구하는 도시를 떠나 가신 우리 주님은 잔인하시며 부도덕하신 분이었을 것이다(눅 5:15-16); 또 종속적이었으며(하나님 말씀을 설교하는 것 다음으로(눅 9:6), 중요했고(그와 하나님의 사자로서 사도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으로서 그들의 메시지를 확증하도록 의도됨)(요 3:2; 행 2:22; 히 2:3, 4); 그리고 성공적이었다(하나의 예외의 경우는 제자들의 신앙의 부족이 그 원인이었다(마 17:20). 그리고 일체를 포함한 것이었다(죽은 자를 살림에서 있었던 이 은사의 최고의 실연이었다(막 5:39-43; 눅 7:14; 요 11:44; 행 9:40).
치유은사와 치유 자체 사이에 구분을 지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학자들은 성경의 정경의 완성으로 치유의 은사도 끝났다고 본다. 더 이상 치유은사가 필요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응답으로 치유를 계속하신다. 사도행전 9장에서 베드로는 그 은사를 통하여(행 9:34) 애니아를 치유했으나 하나님은 베드로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다비다를 치유하셨다(행 9:40). 하나님께서 치유자없이 사람들을 치유하신 예들이 있다(고후 17:8-9; 딤전 5:23).

방언(고전 12:28)
사도행전은 성경의 방언이 언어였음을 입증한다(행 2:6, 8, 11). 외국인 유대인들이 오순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사도들이 그들의 모국어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들었다(참고, 8-11절).
사도행전과 고린도서의 방언은 같았다. 고린도의 방언이 사도행전의 것과 다르거나 혹은 그것들이 천사의 말이었다는 증거는 없다(고전 13:1)
방언들은 작은 은사였다(고전 12:28). 교회의 설립을 위해 주어졌던 기초적인 은사들은 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 목사, 그리고 교사였다(고전 12:28; 엡 4:11). 방언이 마지막에 언급된 것은 그것들이 중요한 혹은 기초적인 은사가 아니었음을 가리킨다(고전 12:28).
방언은 일시적인 표적은사였다(고전 13:8). 그것들이 그칠 것이라는 구절은 중간태이며 그것들이 스스로 멈추게 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방언은 완전한 것이 올때까지 지속되지 않을 것을 내포하고 있다. 지식과 예언의 은사가 끝나게 될 때 - 그러나 그것들의 유용함이 끝나게 될 때와 일치하여 그것들도 중지될 것이다. 만일 방언이 완전한 것이 올때까지 지속된다면 그 동사는 형식에서 수동태가 적합할 것이다.
방언은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시대의 한 부분이었으며 사도들의 하나의 확증하는 표로서 기적의 은사와 더불어 필요했다(고후 12:12).
성경이 완성되므로 확증하는 더 이상의 어떤 표도 필요가 없다. 성경이 이제는 하나님의 종들이 선포한 메시지를 확증하는 권위이다(고전 13:10-11; 14:20).
방언은 불신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의 표로 쓰였으며 그 의미에서 복음증거로 사용되었다(고전 14:21-22).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총회로 들어오고 사람들이 외국어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서 이사야 시대를 회상케 하시는 일을 하셨다는 그들에 대한 하나의 표지였다.
방언 통역(고전 12:10). 방언의 통역은사는 방언의 은사를 가진 자에 의해 말해진 외국어를 해석하기 위한 회중안에 어떤 사람의 초자연적 능력을 포함하였다. 그 언어는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을 위한 모국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복음전도(엡 4:11)
복음 전도자는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자를 의미한다. 복음전도의 은사는 구원의 좋은 소식을 효과적으로 선포하므로 사람들이 개종과 제자의 신분으로 그리스도의 요구에 반응하는 것이다.
복음전도의 은사에 포함되는 것들
1) 잃어 버린 자에 대한 부담이 포함된다. 이 은사는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려는 큰 열망이 있는 은사이다.
2)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 포함된다. 전도자는 좋은 소식을 선포한다. 여기에는 개인 대 개인의 전도와 다수의 군중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포함된다.
3) 복음전도의 은사는 복음의 분명한 제시가 포함된다.
   구원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내용으로 죄,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 신앙, 용서, 화해를 성경적 배경이 없는 불신자에게 복음을 이해할 수 있게 단순하고도 명백하게 전하는 능력이다.
4) 이 은사는 복음의 선포에 반응이 포함된다.
   이 은사를 지닌 사람은 복음의 제시에 대한 반응을 본다. 그것이 이 은사가 있다는 표지이다.
5) 이 은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로 오는 것을 봄으로 기뻐한다. 그것이 짐이요 열정이기 때문에 복음 전도자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 오는 것을 기뻐한다.
   전도는 복음전도의 은사를 받은 자만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전도는 해야 하며 은사를 받은 자가 아니더라도 성령님의 역사로 믿고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목사교사(엡 4:11)
이 은사는 에베소서 4:11에 언급되어 있는데 두가지 은사가 아니다. 목사(Poimeanas)란 말은 문자적으로 목자이며 여기서만 은사로 쓰였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에 관해서도 쓰였다(요 10:11, 14, 16; 히 13:20; 벧전 2:25). 그리고 영적 목회 사역자는 목사 교사이다. 목사로서 양무리를 돌아보고 그의 감독아래 있는 자들을 인도하며 지키고 보호하며 예비하는 자이다.
사도행전 20:28에서 바울은 에베소에서 온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교회를 보살피라고 권면하였다.
목회는 자원해서 해야지 물질적인 유익을 위해서 해서는 안 되며 신자들을 지배함으로가 아니라 겸손한 모법으로 해야 한다(벧전 5:2-5).
이 은사는 두 번째 국면이 있는데 가르치는 능력이다.  종종 교회의 목사에 대해 그는 잘 가르칠 수 없으나 그는 좋은 목사라고 말한다. 물론 그것이 가능할 수 있다. 만일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는 목자와 교사 모두일 것이다. 그는 가르침으로 인도하며 경계하며 보호한다. 이것은 지역교회에서 신자의 성숙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가르치는데 성실할 것을 강하게 권하였다(딤전 1:3, 5; 4:11; 6:2, 17).
장로란 말과 몇가지 연관된 것이 있다. 장로(딛 1:5)는 그 직분의 품위를 가리키며 감독은 기능 혹은 장로의 일을 가리킨다(딤전 3:2). 그것은 목양의 사역이다. 목사는 그 은사를 가리키며 역시 목사와 교사로서의 일을 강조한다.

교사(롬 12:7; 고전 12:28)
목사는 역시 교사이다. 그러므로 교사는 목사일 필요는 없다.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큰 관심이 있으며 자신을 말씀에 대한 연구에 헌신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능력을 지녔으며 그 말씀을 사람들의 삶에 적용할 것이다. 이 은사는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진리를 취할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보통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명백한 방법으로 소통할 능력을 지닌 자다. 그것이 가르치는 은사이다. 이 은사는 신자들을 성숙케 하는 중요성 때문에 신약에서 지역교회에 강조되었다(참고, 행 2:42; 4:2; 5:42; 11:26; 13:1; 15:35; 18:11). 이 은사도 역시 발전이 요구된다.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 사람이라도 그 은사를 효과적으로 쓰려면 진지한 연구와 그 의사의 성실한 실행이 요구된다. 또 가르치는 것은 타고난 탈랜트와 같은 것이 아니다.

섬김(롬 12:7)
섬긴다는 말(diakonia)는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한 말이다. 이 말은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목회나 일반적인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을 가리켰다. 예를 들자면 디모데와 에라스도는 에베소에서 바울을 섬겼다(행 19:22). 바울은 구제 헌금을 전달함으로 예루살렘 신자들을 섬겼다(롬 15:25). 오네시보르는 에베소에서 섬겼다(딤후 1:18). 오네시모는 그가 감옥에 있었을 때 바울을 도왔다(몬 13절). 히브리 신자들은 친절한 행동을 보여 주었다(고전 12:28).
돕는다는 말(antilempsis)은 돕는 행위, 조력을 의미한다. 이 말의 기본적인 의미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떠맡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섬김과 유사하며 섬김의 은사와 같이 보기도 한다. 신약에서 이 말은 여기서만 나온다. 그러나 연관된 헬라어 anilambanesthai는 누가복음 1:54; 사도행전 20:35; 디모데전서 6:2에 나온다. 돕는 은사는 도움을 주기 위해 어떤 사람을 단단히 붙잡아 주는 것을 의미한다.
돕는 은사는 필요한 자들을 구조하는 것을 가리킬 것이며 그들은 가난, 질병, 과부, 고아, 나그네, 여행자 등 일 것이다.

믿음(고전 12:9)
모든 신자는 구원신앙을 가졌다(엡 2:8). 그리고 그들의 영적인 순례에서 그들을 지속케 하는데서 믿음이 드러날 것이다(히 11장). 믿음의 은사는 신뢰의 비상한 행위로 그 믿음 자체를 증명하는 신앙이다. 이런 사람은 이루어야 할 부족한 무엇을 보는 능력이며 비록 그것이 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그것을 하실 것을 믿는 능력이다.
스데반은 이 은사를 드러낸 사람이었다. 그는 믿음이 충만한 자였다(행 6:5). 근래에 죠지 뮬러나 허드슨 테일러같은 사람들은 믿음의 은사를 지닌 자들의 탁월한 예이다.

권면(롬 12:8)
권면이라는 말(parakalon)은 돕기 위해 곁으로 부른다는 뜻이다. 동사형은 신자의 돕는 자로서 성령님에 관해 사용되었다(요 14:16, 26). 권면하는 자는 개인의 의지에 호소하며 그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호소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권면의 은사는 종종 가르치는 것과 함께 쓰였다(참고, 딤전 4:13; 6:2). 그리고 양심과 마음에 호소한다.
권면의 은사는 어떤 사람을 행동의 특별한 경로를 따르도록 권고하거나 어떤 사람의 시련이나 비극의 관점에서 위로하는 것일 것이다(행 4:36; 9:27; 15:39).

영들을 분별함(고전 12:10)
성경이 완성되기 전 초대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교회에 전달할 개인들에게 직접 계시해 주셨다. 그렇다면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 계시가 참된 것인지 거짓인지를 어떻게 알았는가? 어떻게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거짓 영에서 왔는지 혹은 인간의 영에서 나온 것인지를 말할 수 있었는가?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를 주셨다. 이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그 은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혹은 거짓된 것인지를 결정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주어졌다. 영들을 시험하라는 요한의 권면은 바로 이에 대한 권면이다(요일 4:1). 유사하게 회중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말했을때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를 받은 자들이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를 결정했다(고전 14:29; 참고, 살전 5:20-21). 직접계시가 성경의 완성으로 끝났기 때문에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는 주어진 계시에 의존하기 때문에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는 중지되었다

긍휼을 베프는 자(롬 12:8)
자비를 보여 주는 것(eleon)은 동정을 느끼며 자비나 동정을 보여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자비를 보여 주는 것은 소경을 낫게 하심이며(마 9:27) 가나안 여인의 딸을 돕는 것이며(마 17:15) 문둥이를 고치는 것이었다(눅 17:13). 자비를 베프는 은사는 가난한 자, 병든 자, 어려움에 처한 자, 고통중에 있는 사람을 향해 동정을 보이며 도와주는 것이다. 더욱이 이 동정은 기쁨으로 행해야 한다. 이 은사를 가진 사람은 기쁨으로 자비를 베풀어야지 고역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

구제(롬 12:8)
준다는 말(metadidous)은 누구와 함께 나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주는 은사는 비상한 능력이며 기쁨으로 다른 사람과 자신의 물질을 나눈다. 주는 은사를 지닌 자는 그의 물건을 열심히 자유롭게 나눈다. 바울의 권면은 관대하게 주라는 것이다. 그것은 벌린 손과 열린 마음, 야망에서가 아니라 동정과 목적의 단순함에서 주는 열린 손과 마음을 가리켰다. 이 은사는 부자를 위해서 예약된 것이 아니라 보통 신자를 위해서 예비되었다. 빌립보 사람들은 그들이 바울의 필요를 공급해 줌으로 이 은사를 사용하였다.

관리(롬 12:8; 고전 12:28)
로마서 12:8에서 바울은 인도하는 자를 언급하고 있다. 인도하는 자란 말은 헬라어 Prohistimi이며 그 의미는 앞에 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도한다. 통치한다 혹은 사회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데살로니가전서 5:12과 디모데전서 5:17에서 장로들에 대해 사용되었다. 고린도전서 7:28은 관리에 대한 은사를 언급하는데 그 말 kubernesis는 문자적으로 배의 키를 잡는다는 뜻이다. 비록 위에 참고한 것들이 사람들을 인도하는 장로를 언급했지만 그 말은 아마도 그 이상으로 역시 그 말에서 주일학교의 감독과 지역교회를 넘어서 크리스챤 대학이나 신학교의 학자나 교장같은 사역을 암시할 것이다.

지혜(고전 12:8)
지혜의 은사는 은사의 목록에서 첫 번째로 나옴으로 중요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6-12에서 자세하게 지혜의 은사를 설명하였다. 거기서 이 은사는 바울이 신자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신적계시처럼 보인다. 이 은사가 직접계시를 받은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계시를 받은 사도들의 은사였다. 지혜의 은사는 계시된 진리의 전 체계이다. 이 지혜의 은사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이 드러난 진리를 받는 능력이 있으며 그것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능력을 지녔다. 이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계시를 받고 전달하는 것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이 은사는 성경의 정경이 완성된 후에 중지되었다.

지식(고전 12:8)
지식의 은사는 지혜의 은사와 밀접하게 나타나며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계시된 진리를 이해하는데 적합한 능력을 가리킨다. 이 은사는 예언과 가르침의 기본적 은사와 연관이 있으며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직접계시의 전달을 포함할 것이다(참고, 고전 12:28). 그러므로 이 은사 역시 성경이 완성됨과 더불어 중지되었다. 고린도전서 12:8은 이 은사가 중지된 것을 가리키고 있다.


기초적인 은사의 관계
고린도전서 12:6-10 고린도전서 12:28 고린도전서 12:28-30
지혜의 말씀 사도직 사도직
지식의 말씀 예언과 가르침예언, 가르침 
 
성령의 충만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다른 사역과 구별되는데 성령충만은 조건적이기 때문이다. 성령님의 내주, 세례, 중생 그리고 인은 경험적이 아니며 모두 개종의 순간에 즉각적으로 일어나지만 성령충만은 경험적이며 역시 반복된다.

정의
성령의 충만을 위한 기초는 에베소서 5:18이다. ‘성령충만하라’ 성령으로 충만케 되라는 명령은 술취하지 말라는 경고에 대조하여 주어졌다. 술취함은 술에 취한 자가 자신을 통제하는 능력이 없음을 드러낸다. 크리스챤의 삶의 특성은 통제 불가능한 술취함의 성질과 대조적이다. 채워진다(plerousthe)의 의미는 ‘통제’이다.  하나님의 성령의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지속적으로 신자의 삶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분이시다.
그 이상의 대조는 영적 신자와 육적 신자 사이에서 엿볼 수 있다(고전 2:9-3:4). 육적 인간은 육신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이며 영적 인간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이다.

설명
성령의 충만은 두 가지 이유에서 필요하다.
1) 그것은 신자의 성숙을 위해서 필연적이다(고전 3:1-3).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육신으로 통제되는 육체적인 존재임을 지적하였다. 육적이고 옛 성품에 따라 사는 것의 해결 방법은 성령으로 통제되고 충만케 되는 것이다.
2) 그것은 신자의 섬김을 위해 필연적이다(행 4:31; 9:17-20). 사도행전 4:31은 충만과 섬김 사이에 관계를 설명하는데 성령의 충만은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도록 신자를 능력있게 한다. 바울은 성령으로 충만했을 때 즉각적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기 시작했다(행 9:17, 20).
에베소서 5:18은 성령의 충만에 대한 개념에 관해서 세 가지 사실을 가르친다.
1) 그것은 명령이다. 성경 어디에서도 신자는 성령의 내주와 인침을 받으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신자는 성령으로 충만케 되도록 명령받았다. 그것은 성숙과 섬김을 위해 지속적으로 성령충만하라는 명령이다.
2) 그것은 조건적이다. 그러나 내주, 세례, 인 그리고 성령의 다른 많은 사역에 관련된 조건은 없다. 하지만 성령충만은 조건적이다. 성경의 다른 명령들에 대한 순종은 성령충만하기 위해 필연적이다.
3) 그것은 반복된다. 에베소서 5:18은 현재 명령법이다. 지속적으로 충만하라는 명령이다. 이는 그것이 단번의 경험이 아니라 반복되는 사건임을 가리킨다.

조건
비록 에베소서 5:18이 성령충만하라는 명령이지만 충만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들이 있다. 놀랍게도 성경에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이 없다. 그 명령은 성령과 바른 관계와 연관된 명령이므로 그 조건들은 반드시 성령충만과 관계가 있어야 한다.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엡 4:30). 에베소서 4:30의 문맥은 죄에 관한 권면과 연관이 있다. 신자들은 거짓말하지 말고(4:25),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며(4:26), 용서하지 않는 것(4:31-32)을 경고하였다. 신자가 이런 일을 하게 되면 그는 성령님을 근심시키게 된다. 죄는 신자를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것을 막는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살전 5:19).
이 구절의 문맥은 섬김과 연관이 있다. 신자는 쉬지 말고 기도하고(5:17) 감사하며(5:18) 예언을 멸시치 말도록 권면한다. 신자가 사역의 불에 찬물을 쏟아 붓는다면 그들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은 장애되지 말아야 한다. 신자는 역시 하나님을 위한 그들의 사역엣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성령으로 행하라(갈 5:16)
걷는다는 의미는 생활의 행위를 말한다. 신자는 성령의 영역에서 살도록 권면하였다.
다른 조건을 더하기도 하는데 죄의 고백(요일 1:9), 하나님께 신자의 헌신이다(롬 6:13; 12:1-2). 그러나 이런 조건은 앞선 세 가지 주된 조건에 종속되는 것들이다.

결과
성령충만의 결과에 관해서는 갈라디아서 5:22-24안에 그 대부분이 들어 있을 것이다. 성령충만의 결과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육신을 따라서 행함으로 육신의 행위를 낳는 대신에(갈 5:19-21) 성령의 충만은,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낳는다(갈 5:22-23). 거기에 더해 신자는 성경이 가르치는 사역을 받아들일 것이다(고전 2:9-13; 요 16:12-15). 성령 충만은 회중안에서 기쁨과 연합과 감사를 드러낼 것이며(엡 5:19-20) 연합될 것이며 사역에서 분별함이 있을 것이다(살전 5:17-22). 그리고 하나님께 헌신이 있고 세상에 타협하지 않음을 보여 줄 것이다(롬 12:1-2).

          글/ 서춘웅 목사
재림과 그 결과
그리스도의 지상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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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춘웅 목사[Rev. David S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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