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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용서(주기도문 강해)
  본문 : 마 6:9-13
RevSuh  2009-12-07 20:29:04, 조회 : 4,051, 추천 : 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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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마 6:9-13)

오늘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우리를 위한 두 번째 간구를 묵상하려고 한다.
이 기도는 어느 간구보다도 길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 기도는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물질적인 필요에 이은 첫 번째 영적인 필요의 간구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이 기도를 해야 하는가? 이 기도의 중요성이 무엇인가? 이 기도의 명령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동물과 다르게 지으셨다. 창세기 2:76에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므로 생령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사람은 육과 영으로 지어졌다. 따라서 육신의 배부름만으로는 참 만족이 없다. 또 1:26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것인가? 하나님은 영이시다. 모습이 없으시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르게 이성적이고 도덕적이란 말이다.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른 동물들을 다스리는 지배권같은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잃어버렸다. 그 결과 생명의 주시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관계가 끊기고 말았다. 하나님과 교제의 축복을 누릴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 죄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 밖에서 만족을 구하게 되었다. Augustine이 그랬다. 그는 육신적 쾌락으로 만족을 얻으려 했다. 결혼도 안하고 살면서 사생아를 낳았다. 그러나 참 만족이 없었다. 지성의 만족을 찾아 철학을 전전했으나 허사였다. 영적 만족을 얻어보려고 마니교라는 사교에 심취했으나 평안과 쉼이 없었다. 하나님없이 세상 것으로 참 만족과 평안을 구해 봤으나 실패했다. 지쳤다. 절망했다.
그런데 어느 날 대문 밖에서 놀고 있던 어떤 아이가 들고 읽으라는 소리에 곁에 놔두었던 성경이 생각이 나서 펴 읽었다. 로마서 13:12이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음성으로 들었다.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그의 영혼이 깨어나 회개하고 모든 죄된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께 돌아왔다. 하나님과 단절됐던 교제의 축복을 맛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하나님께 돌아오기까지는 참 평안과 쉼이 없었습니다! 그렇다! 우리는 창조주되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참 만족도, 쉼도, 평안도 없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와 교제를 통해서만 영적인 만족과 쉼을 얻을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고 있는 교제의 장벽, 죄의 담을 무너뜨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 누구도 스스로 죄를 사하고 용서받을 수는 없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셨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다. 예수님이 그 목적을 위해 오셨다. 그리고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우리 대신 죄인으로 정죄되시고 심판받아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 죄를 사하셨다.
로마서 5:8대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를 믿는 자는 그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 죄에서 구원받았다. 죄로 죽었던 우리가 살았다. 중생했다.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았던 죄의 담을 허시고 하나님께 나갈 길을 여셨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히브리서 4:16처럼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교제가 회복된 것이다.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완전히 사해졌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의 죄가 사해진 것을 이렇게 말씀한다. 시편 103:12, 하나님께서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멀리 옮기신다고 했다. 동과 서는 아무리 멀리 간대도 결코 만날 수 없다. 미가서 7:19에는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신다. 골로새서 2:14에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예레미아 31:34에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도 아니하신다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내어 주신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을 때 내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실 때 우리 죄를 사하시되 완전하게 도말하신다. 멀리 옮기신다. 깊은 바다에 던지신다. 기억도 하지 아니하신다. 과거에 지은 죄, 오늘에 짓는 죄 아니 장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하셨다. 아멘!
찬송가 205장이 그것이다.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살게 된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있게 된다. 흰옷을 입고 밝고 빛난 천국에서 길이 살게 될 것이다. 무엇으로요? 용서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은 자다. 완전히. 그러면 완전한 죄 사함을 받았는데 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기도해야 하나?
요한복음 13장에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으신 장면이 나온다. 저녁을 잡수시던 예수님, 자리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씻어 주셨다. 그런데 베드로의 차례가 오자 주여! 주께서 제 발을 씻기시나이까? 절대로 못 씻으십니다. 어찌 예수님이 제 더러운 발을 닦으십니까? 거꾸로 되었습니다. 제가 주님의 발을 닦아 드려야지요. 안됩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씻지 않으면 네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베드로를 보라!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10절, 예수님의 말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이미 목욕한 자, 무슨 말인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신자는 이미 목욕한 자와 같다. 깨끗하다.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 자는 완전하게 죄 용서받은 자다. 그러나 이렇게 목욕을 했어도 땅을 밟고 살지 않는가? 발은 먼지로 더러워진다. 그 발을 닦아 깨끗이 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지만 그 하나님께 예수 믿는 신자가 짓는 일생의 죄도 죄이다. 그러나 그 죄는 정죄와 심판으로 지옥에 가지는 않는다. 그 큰 죄는 이미 용서받았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받은 것이다. 이제는 죄의 지배를 받지는 않는다. 죄의 종이 아니다. 그러나 죄의 뿌리가 남아 있어서 유혹과 시험에 빠지기도 하고 하나님을 떠나 세속을 따라 살게도 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날마다 땅밟고 살면서 먼지로 더러워진 발 같은 것이다. 그 발을 닦아야 한다.
보세요. 양식이 일용할 양식이나 날마다 필요하다. 그처럼 땅을 밟고 사는 우리는 날마다 발을 닦아야 한다. 우리 믿는 신자가 죄를 짓는다고 심판받고 구원을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과 교제에 손상을 입힌다. 아버지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 드린다. 그 상태가 지속되면 기쁨도, 평안도, 은혜도 떠난다. 하나님과 교제가 안 되니까 날마다 주시는 은혜도 축복도 없다. 회개해야 한다. 용서받아야 한다.
제가 작년 꽤 오랜 시간 디스크로 다리와 발이 아팠다. 그래 척추신경원에서 상경추 교정치료를 받았다. 물론 완전히 다 치료된 것은 아니었으나 많이 좋아졌다. 의사의 얘기다. 큰 치료는 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가끔 와서 메인테넌스를 해 주셔야 합니다. 아직 안 가고 지금까지 잘 견딘다. 그러나 그 의사의 말은 맞는다. 그처럼 큰죄 용서받았다. 작은 죄, 날마다 회개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시켜야 한다.
그래 요한일서 1:8,9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그렇다. 이미 완전하게 큰 용서 받았지만 죄짓고 산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 고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그렇다! 회개하면 용서하신다. 하나님과 교제가 회복된다.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고 돌아서면 하나님의 은혜가 사랑이, 주시는 참 평안이 충만케 될 것이다.
여러분! 내가 용서받은 죄인임을 알고 날마다 회개하므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지속시켜 가시기를 바란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는 거기서 더 나간다.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마가복음 2:7대로 하나님만 우리 죄를 사하실 수 있지 않은가? 모든 죄는 엄밀하게 보면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과 명령을 어긴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했거나 하라는 것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이 죄는 또 우리가 갚아야 할 빚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만 사하실 수 있는 것이 있고 우리가 용서해 줄 수 있는 것이 있다. 오늘 본문의 말씀하는 죄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 우리에게 잘못한 것, 그 죄를 우리가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왜 용서해야 하나? 그 이유가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18:23에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던 임금과 같은데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주인(임금)에게 데려왔다. 빚진 종은 갚을 것이 없었다. 주인이 네 몸과 처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으라고 했다. 빚진 종이 엎드려 절하며 다 갚겠습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주인이 불쌍히 여겨 그 빚 만달란트나 되는 큰 빚을 다 탕감하며 자유케 했다. 그 돈은 달라로 환산한다면 수백 만불이 된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그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독촉한다. 그 동료가 엎드려 사정한다. 참아 주면 다 갚겠다고. 먹고 살기가 힘드니 조금만 참아 주시오. 안되요! 당장 갚아요. 그리고 그를 끌고 가서 옥에 가뒀다. 100데나리온은 달러로 하면 수십불 정도일 것이다.
다른 동료들이 보고 민망해서 주인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리니 주인이 이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불쌍히 여겨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겨야 하겠거늘 마땅히 탕감해 줘야 하겠거늘 옥에 가둬? 그리고 진노해서 그 종에게 만달란트 빚을 갚도록 옥에 가뒀다.
:35절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네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 그렇다! 우리는 모두 이 비유에 나오는 만달란트 빚진 자와 같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 큰 죄를 다 사해주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다른 사람들의 죄는 100데나리온밖에 안된다. 용서치 않는다면 악한 종이 되고 말 것이다. 큰 죄사함받았으니 적은 죄 사해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니 용서해야 한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셨으니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그의 자녀되었으니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사랑해야 한다.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이상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반드시 용서해야 할 이유를 말씀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물론 이 말씀은 우리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잘못한 것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는 원인이나 이유나 동기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예수님의 희생이 전부다. 은혜이다.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마치신 일이다. 그러나 이 본문은 우리의 용서가 조건이 된다고 말씀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하고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것을 우리가 확신할 수도 경험할 수도 없게 된다.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는데 큰 장애가 되고 만다. 우리가 내가 잘못한 이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어찌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신 것을 믿을 수 있겠나? 용서받은 확신과 기쁨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어느 목회자가 결혼을 하면서 에베소서 4:26을 실천하기를 결심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며.. 그래 그와 그의 아내는 결혼생활을 하면서 결코 논쟁하고 서로 사과하지 않거나 성난 말들을 용서하기 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손님방이 있어서 늘상 5, 6명의 학생들이나 선교사들과 함께 지냈다. 어느 주일아침 남편이 북런던에 있는 교회에 설교하러 떠나기 전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데 한 여학생이 식탁에서 남편에게 건방진 소리를 했다. 그 말을 들은 남편도 같은 말로 되받아쳤다. 아내가 남편을 꾸짖었다. 남편은 아내에게 불친절한 태도를 보이며 문을 탕 닫고 차를 타고 떠나버렸다. 아내는 그렇게 떠난 남편 때문에 행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저녁때가 되기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너무 성급하게 남편을 나무란 것이 맘에 걸려 미안하다고 말하길 원했다. 그녀가 교회를 가려고 떠나기 전에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제 곧 교회에 도착할 거요. 설교할 준비가 되었소. 그러나 내가 당신의 용서를 구할 때까지 난 설교를 할 수 없소. 자기의 불친절한 행동을 사과했다. 그가 저녁에 집에 돌아왔을 때 그들은 함께 즐거워 할 수 있었다. 남편의 말이 내가 수년 동안 설교를 했으나 오늘처럼 능력있는 말씀을 경험한 적은 없소! 아내는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은혜로우신가? 하나님을 찬양했다. 우리가 부부간에 형제간에 이웃간에 불화하다면 바로 지금 화목해야 한다. 용서해야 한다. 용서받아야 한다. 해가 지기 전에 해야 한다. 우리의 용서가 일상의 적은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조건임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 기도를 하려면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 물론 용서는 쉽지만은 않다. 용서받은 자임에도 그것이 의무이고 하나님의 용서의 조건이 되어 용서할 때 용서받은 확신과 기쁨이 있더라도 쉽지 않다. 그래서 Augustine은 이 기도는 두려운 기도라고 하였다. 왜 해야 하는데 못하나? 안하나? 비용 때문이다. 값없이 쉽게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생없는 용서는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쉽다. 회개하고 믿으면 된다. 그러나 우리를 용서하신 큰 희생의 댓가를 지불하셨다. 하나뿐인 외아들 예수님을 죄많은 세상에 보내시고 죄인들을 대신해서 그 죄값을 치르도록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 사랑하는 외아들을 포기하셨다.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 정죄되시고 심판받으사 십자가에 죽으시었다. 용서는 십자가가 그 댓가다. 십자가가 무엇인가? 죽는다는 뜻이다. 내가 죽어야 용서가 된다. 내가 죽어야 십자가의 예수님이 살아나신다. 내가 살아 내게 잘못한 이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된다.
Daily telegraph에 1993년 11월8일 월요일 96세에 죽은 중국내지선교회의 선교사로 영국 태생인 Alfred Bosshardt의 사망 기사가 났다. 그는 외국 선교사로 잡힌 소수의 외국인으로 1930년대 중반 공산주의자들의 전설적인 긴 행군으로 부르는 2500마일을 걸어가며 수모와 고통을 당했다. 그는 마을 광장에서 아우성치는 공산 폭도들 앞에서 제국주의 스파이로 고소되었다. 그는 거듭 요구된 속량의 댓가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옷이 벗긴 채 대나무 몽둥이로 수없이 맞았다. 그의 사망 기사에는 두 가지가 언급되었었다고 해요. 첫째 그의 고된 고문을 겪으면서 (Ordeal) 보삿드는 그의 체포자에게 사랑을 보였다. 칼을 사용하면서 젓가락으로 뜨개질하는 바늘을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그를 감시하는 군인의 양털 모자와 장갑을 떴다.
둘째로, 긴 행군의 무서움 속에서 그는 미워하는 마음을 다 털어내고 그 자신에게 말했다고 해요.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사랑하시니 나도 역시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실천이다.
여러분! 아직도 지금도 용서치 못한 사람이 있나? 나는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자임을 잊지 말라.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반복하면서도 형제를, 이웃을, 그 누구를 용서할 수 없다면 그것은 죄에 죄를 더하는 것이 된다.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다.
C. Spurgeon은 다른 이를 용서하지 않고 주기도문을 반복하면 그때마다 우리는 사형판결을 읽는 것이라 하였다.
여러분!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나? 용서받지 못한 잘못이 있나? 이 시간 용서하라. 용서를 빌라. 십자가를 지세요. 오늘 해를 넘기지 마세요. 그리하여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기도할 수 있는 용서받은 자의 기쁨과 용서하는 자의 기쁨을 누리시며 살아가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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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춘웅 목사[Rev. David S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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