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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죽고 살자
  본문 : 롬 6:1-11
RevSuh  2010-05-10 17:51:30, 조회 : 4,059, 추천 :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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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살자(롬 6:1-11)

존 뉴톤은 그가 죽기 전에 묘비를 썼다. 한때 불신자이며 난봉꾼이던 나. 아프리카 노예들의 종인 내가 우리 주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긍휼로 인해 보존되고 회복되고 용서받았다. 그리고 내가 한때 그토록 오랫동안 파괴시키기 원했던 그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서 세움을 입었다.
그는 한때 노예로 전락할 뻔도 했고 노예무역 선장을 했으나 그가 예수를 믿고 후에는 목사가 됐다. 그리고 영국에서 노예무역금지법을 만들도록 윌리암 윌보훼스 의원에게 영향을 주었고 마침내 오랜 세월 후에 영국에서는 노예를 영국 영토내에 들여오는 것을 금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내에서 노예를 내려놓을 수도 없게 되었다가 1833년 노예해방법이 발효되었다.

존 뉴톤은 예수님을 만나 새사람이 되었고 그 감격에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의 찬송시를 지었다. 새사람이 된 뉴톤이 과거의 무신론자로 하나님을 모독하고 친구들을 타락시키며 노예 무역 선장으로 온갖 죄악을 저지르던 죄인의 괴수같은 옛사람의 뉴톤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을까?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문제에 해답을 주고 있다.  5장 마지막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씀했다. 이것이 사실이었다. 일가족 5명을 도끼로 살해한 고재봉도 예수를 믿고 감옥에서 다른 죄수들에게 예수를 전하는 전도사가 되었다.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예수를 믿고 그 삶이 변해 전도사가 되고 목사가 되고 부흥강사가 되어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이들이 있다. 이천석 목사는 깡패였다. 성결교회의 부흥강사 이성봉 목사님이 한강 백사장에서 전도집회를 할 때 깡패들을 데리고 가서 천막 집회소를 다 두들겨 부수려고 했다. 그러나 거기서 이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거꾸러져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후에 목사가 되고 부흥강사가 되었다. 그의 설교에 간간히 욕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교만했던 사람들이 깨지고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한다. 거기 능력이 있다. 그렇다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려 하지 않겠는가? 모든 죄가 예수를 믿을 때 그 순간에 다 사해진다. 죄의 경중이나 다소가 문제되지 않는다. 게다가 도덕적인 품성이나 선행과 상관이 없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 순간에 죄가 사해지고 죄인이 의인되고 천국에 갈수 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두 강도. 그 강도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겠나? 두 강도 중에 회개한 강도가 예수님을 비방하는 다른 강도의 말을 듣고 우리는 십자가에 죽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게 큰 죄인임을 자인했다. 그렇지만 순간에 예수를 믿을 때 예수께서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지 않았나? 그렇다면 예수를 빨리 믿을 필요가 있겠나? 십자가의 강도처럼 내 욕심따라, 정욕따라 실컷 세상을 즐기고 살다가 마지막 죽기 전에 예수를 믿으면 되지!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미 예수를 믿는 자들 중에서 이런 사람이 있다. 그런데 완전하지 못하다. 유혹에 약하고 시험에 빠진다. 그때마다 번거롭게 회개해야 하나? 다 모아 두었다가 단번에 용서받자. 죄짓기에 담대하다. 그럴 수 있을까? 반대로 이처럼 의롭게 살려고 힘쓴다. 죄를 짓지 말아야지 그런데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다. 회개한다. 그런데 또 죄를 짓는다. 난 안돼! 앞으로 천국가기까지 그 많은 시간, 그 먼 길을 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시험이 있겠는가? 나 죄짓고 천국에 못가면 어쩌나?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군대갔다가 복학하니 예과 친구가 히브리어 강사가 되어 있었다. 매일 시험 점수를 불러준다. 숭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왔다. 어렵다. 매일 꼴찌다. 중도탈락해서 봇짐에 시골을 다니면서 전도해야지, 목사가 교회목회 못하겠다고 포기했다. 할 수 있는데 포기했다.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해 오늘 본문의 대답은 단 하나다. 2절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아니라는 것이다.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죄가운데서 살 수 없고 죄에 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죄를 짓는데 담대해서도 안 되고 죄가 있다고 낙심하고 염려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3절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을 줄을 알지 못하느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세례받은 것과 같다는 것이다.

여러분!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가? 원래 이 말은 물속에 잠긴다는 뜻이다. 물속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죽는 것을, 거기서 다시 올라오는 것은 사는 것을 상징한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됨으로 옛사람과 죄의 능력에 대해 죽었으며 의로워진 자의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제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가 임재하심으로 해서 죄를 이기는 능력이 있게 되었다. 그래서 4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를 믿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되었다는 것이다.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내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그와 함께 다시 새 생명으로 부활했다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서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이론이 아니다. 예수를 믿기 전이나 내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묶여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었다는 뜻이다.

십자가에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되었듯이 우리도 그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을 뿐 아니라 주님과 함께 무덤에 장사되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6절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함이다.

여기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목적을 말씀하고 있다. 그 첫째 목적은 죄의 몸을 멸하기 위함이다. 무슨 뜻인가? 여기서 죄의 몸은 우리의 육신이 아니다. 죄가 지배하는 우리의 전인격을 가리킨다. 그리고 멸한다는 말은 우리의 죄성이 파괴된다, 죽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무력하게 또는 무능하게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죄가 새사람이 된 우리를 지배할 힘을 잃었다는 것이다. 죄의 세력이나 권세로서 무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죄가 그 지배력을 상실했다. 십자가에 옛사람 죄가 못 박혀 죽은 두 번째 목적은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7절이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과 함께 세례받은 자, 연합된 자, 믿는 자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나? 그럴 수가 없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순간 지금까지의 모든 죄가 단번에 다 사해지는데 더 죄를 짓다가 세상을 실컷 즐기다가 마지막 죽기 전에 회개하고 천국가면 되지라고 할 수 없다. 그렇게 죄를 짓는데 담대할 수가 없다. 죄에 대해 죽었다.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그러니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것이 죄에 대해서는 죽는 것이요 죄의 몸이 멸하는 것이요 죄가 더 지배를 못하게 되는 것인데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라면 왜 아직도 죄를 짓게 되는가?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는가? 왜 아직도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해야 하는가?

이제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자가 아니다. 죄가 지배하는 영역에서 벗어나서 의가, 은혜가, 주님이 다스리는 곳으로 왔다. 예수 안에 있다. 그러나 천국에 가기까지는 아직도 아담 안에서 살려는 근성이 남아 있다. 아직도 죄사함 받은 의인일 뿐이다. 완전해 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유혹과 시험에는 죽지 않았다. 그래 넘어지기도 하고 범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참 신자는 죄에 거하지 않는다. 무슨 말인가? 죄가운데서 살지는 않는다. 그게 무슨 말인가? 죄가, 사단이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이 아니다. 죄에 예속되거나 종이 되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 따라서 참 신자는 죄짓고 이러다가는 영영 죄인이 되고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사단이 쓰는 계략이다. 물리쳐야 한다. 죄는 힘을 잃었다. 우리는 죄의 종이 아니다. 죄가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죄 따위야! 죄를 우습게 보아서는 안 된다. 죄를 지어도 괜찮아. 그것도 사단의 계략이다.

옛날 왕에게 설교를 했던 궁정 목사는 왕의 죄나 방탕한 삶을 꾸짖지 못했다. 꾸짖고 정배된 이들이 있었다.  궁정목사로 데려온 그들이 왕 앞에서 그의 죄를 꾸짖겠나? 그래서 대부분은 관대했다.

제정 러시아의 종교 보좌관이 왕족이 죄를 지을 때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설교를 했다고 한다.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그럴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쳐난다. 보통 죄인이 되면 하나님께 보통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큰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서라면 계속 반복하여 죄를 지어도 괜찮습니다 라고 설교를 했다. 어찌 되었겠나? 제정 러시아는 망하고 말았다. 그 종교 보좌관은 불가능한 얘기로 왕을 달랜 것이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나? 예레미야 5장 31절에 선지자들은 거짓 예언한다. 왕과 백성이 듣고 싶은 말을 전한다. 제사장은 권력에 눈이 어두웠는데 그리 끌고 가니 백성이 그것을 좋게 여겼다. 그리고 백성도 선지자 제사장도 모두 망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11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

여기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로 여길지어다 여기란 말은 생각해라, 간주하란 말이다. 물론 이 말은 실제로는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고 믿어라가 아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죄에 대한 죽음이요 부활이 하나님께 대한 부활이라면 십자가의 세례로 우리가 죽음과 부활에서 예수님과 연합되었다면 우리 자신이 죄에 대해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것이다. 그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하고 생각하며 살라는 것이다.

존 스토트 목사가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이런 예를 들고 있다. 결혼한 여인이 있다. 그런데 독신인 것처럼 살 수 있는가? 있다.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물론 그것은 잘못된 삶이다. 결혼한 자로 여겨야 한다. 어떻게 가능한가? 그녀가 누구임을 알게 해야 한다. 그녀의 남편과 연합한 새로운 삶의 상징이 되는 그녀의 결혼반지를 보게 하라. 그러면 어찌 되겠나? 남편과 결혼한 여자로 살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 믿고 새사람 되었다. 죄에 대해 죽었다. 그러나 아직도 죄안에 있는 것처럼 살 수 있나? 있다. 유혹과 시험에 넘어지고 쓰러진다. 죄의 영역으로 넘어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누구임을 기억하게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다.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의 새로운 상징의 세례를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다시 의로운 삶,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의 삶을 원할 수밖에 없다. 새 사람된 우리가 옛사람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황의성이란 분은 성령이 계시네 란 책을 쓴 사람인데 그는 소년시절부터 절도와 폭력, 강도, 강간 등 닥치는 대로 죄를 지어 여러 번 교도소를 드나들었다. 1970년 12월에 7개월 복역기간을 남기고 안양 교도소로 이송되었다. 새 감방에 들어가니 고참들이 고통을 주기 시작했다. 화가 나서 육탄전으로 맞섰으나 그때마다 죽도록 매만 얻어 맞았다. 그러던 어느 날 변기통 옆에서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며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죄수가 있었다. 그는 눈물을 흘린 채 그의 피를 닦아 주고 간호해 주었다. 어느새 그 죄수와 가까워졌고 그의 전도로 예수를 영접하게 됐다. 성경을 읽으면서 성령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꼈다. 그의 삶이 180도로 달라졌다. 교도소에서 3개월을 앞당겨 출소시켰다. 그는 2001년 3월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것은 그의 믿음이 약해질 수 있는 시련기였다. 그때 그는 찬송가 427장을 하루에 3-5번씩 쉬지 않고 불렀다.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로 여기는 삶을 살았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성령이 내게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니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네! 세상 죄에 빠져 평안함이 없을 때 예수 십자가에 공로 힘입어 참된 평안 얻었네. 세상 모든 정욕과 나의 모든 욕심을 십자가에 이미 못을 박았네. 성령이 계시니 좁은 길을 걸어도 밤낮 기쁨이 있네. 이 찬송을 하루에 5번 이상 부른 것은 시련 때 주님을 믿고 의지하기 힘들 때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로 살려는 몸부림이었다. 이것이 참 신앙의 삶이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내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난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이렇게 죽고 사는 것이 예수를 믿는 신앙이다. 그렇다면 죄를 두려워해서도 안 되고 죄짓기에 담대해서도 안 된다. 죄의 유혹과 시험 앞에서 죄에 대해서는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처럼 죄와 싸워 이기는 승리자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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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춘웅 목사[Rev. David S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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