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기의 견해

환란기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대환란으로 알려진 사건들의 복합성 사이에 관계된 문제이다. 원리에서 모든 전천년설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전에 7년기의 큰 소동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질문은 대환란에 앞서 세상에서 교회를 옮기기 위해 구별된 오심이 있게 될지 혹은 교회가 대환란을 통과한 후에만 주님과 연합될지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대환란전에 그 자신에게 교회를 취하신다는 견해는 환란 전설이라고 부르며 그가 환란후에 교회를 취하실 것이란 견해는 환란후설이라고 부른다. 거기에는 역시 중간적인 입장도 있다.

환란전설
환란전설자들에 의해 주장되는 몇 개의 구별된 사상들이 있다.
그 첫 관심사는 그 환란의 성질이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비교불가능한 대환란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방인을 취급하심이 끝이 나고 천년왕국과 그 안에서 발생할 사건들을 준비하는 변화의 기간이 될 것이다. 그 환란은 신자의 징계나 교회의 정화를 위한 시간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두 번째 전환란설의 중요한 사상은 교회의 휴거이다. 그리스도가 대환란전에 세상에서 교회를 옮겨가시기 위해 오실 것이다. 이 오심은 의미에서 비밀일 것이다. 불신자의 눈으로는 그것을 관찰할 수가 없다. 휴거는 데살로니가전서 4:17에 묘사되었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휴거에서 그리스도는 그가 환란의 끝에 교회와 함께 오실때처럼 땅으로 일부러 내려오시지 않을 것임을 주목하라.

환란전설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재림 교회와 함께 그리스도의 재림
환란 천년왕국


  그러므로 환란전설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두 국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는 두 번의 재림이 있다고도 한다.  거기에는 역시 세 번의 부활이 있다. 첫 번째는 휴거에서 의로운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때 산 신자들은 죽은 자들보다 앞서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환란기의 마지막에 환란기중에 죽은 성도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환란기의 끝에 불신자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
휴거의 관점은 환란에서 교회를 구출하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들이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에게 쏟아부으실 진노를 경험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기 때문에 우리는 구주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도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우너을 받게 하심이라” (살전 5:9);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10)
그러나 마태복음 24장에 언급하는 것은 택자의 얼마는 환란기에 있을 것을 가리키지 않는가?
                                                                          
우리는 제자들이 유대인의 구조체제에서 그리스도의 오심과 시대의 종말에 징조가 무엇일지를 물은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마 24:3; 참고, 행 1:6). 그리고 따라서 예수님의 여기서 호의는 주로 이스라엘의 장래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복음서가 교회나 그리스도의 몽 혹은 어느 유사한 표현보다 일반적 용어로 선택을 사용한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택함받은 유대인이지 환란기간에 있는 교회가 아니다.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에 이 구분은 세대주의와 밀접하게 연합한 환란전설의 결정적인 어려운 부분이다. 그 환란은 그의 원래의 선민 민족적 이스라엘과 그의 재건하시는 관계로 교회를 구조하는 하나님의 다루심에서 변화로 보는 것이다(견해).
마지막으로 환란전설은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것을 강하게 강조한다. 그의 재림이 환란전에 있기 때문에 휴거에 앞서 이루어질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한 그의 오심은 어느 때나 다른 순간안에도 일어날 수 있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의 재림의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그의 청자들에게 깨어 있을 것을 권고하셨다(마 25:13). 열처녀의 비유는 이 메시지를 담고 있다. 노아의 때처럼 거기에는 경고하는 표지가 없을 것이다(마 24:36-39). 주님의 오심은 밤중에 도적같이 오실 것이다(마 24:43). 혹은 기대하지 않은 시간에 돌아올 주인같을 것이다(마 24:45-51). 거기에는 갑작스런 분리가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이 하늘에서 일할 것이고 두 여인이 맷돌을 갈 것이다. 각 경우에 한 사람은 취해지고 다른 사람은 남겨질 것이다. 얼마나 분명한 휴거에 대한 묘사인가? 재림은 어느 순간에 이루어질 것이므로 깨어 근면하게 일하라는 명령이 아주 많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한 것을 믿기 위한 다른 근거가 있다. 교회는 복된 소망을 가질 수 있다(딛 2:13).
만일 적그리스도와 대환란이 종말적 의제에 다음 조목이라면 바울은 교회에게 고난과 박해와 고통을 기대하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신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살전 4:18)의 사실로 서로 위로하라고 하였다. 다음 사건이 교회가 소망의 기대로 앞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오심이 있다. 거기에는 어느 시간에 일어남에서 그것을 막을 것이 없다.
마지막으로 환란전설은 적어도 두개의 심판이 있을 것을 주장한다. 교회는 휴거의 때에 심판받을 것이다. 성실함을 위한 상급도 그때 분배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천년왕국의 끝에 양과 염소의 분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교회의 신분이며 결정되었을 것이다.

환란후설
환란후설자들은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오심이 대환란의 종결때까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환란 천년왕국

    
그들은 휴거라는 단어를 피한다. 왜냐하면 (1) 그것은 성경적 표현이 아니라 (2) 그것은 교회가 그 환란을 피하게 되거나 환란에서 구출된다는 신념은 환란후설의 본질에 대조하여 가기 때문이다.
환란후설의 첫 번째 특징은 환란전설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종말의 사건에 대해 비교적 덜 문자적 해석을 한다. 예를 들면 환란전설자들은 다니엘 9:27에(샤부아)는 대환란이 문자적으로 7년 동아네 있을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취하는데 대부분 환란후설자들은 단지 그 환란이 단시 마지막 시간의 실재하는 기간이라고 주장한다. 유사하게 환란전설자들은 일반적으로 천년왕국의 구체적인 개면을 가진다. 예컨대 그들의 견해에서 천년왕국은 그리스도의 발이 문자적으로 감람산위에 서실 때 시작된다(슥 14:4). 천년왕국에 대한 환란후설자등의 이해는 본질상 훨씬더 개괄적이다. 예를들면 그것은 그 길이에서 1000년이 될 필요는 없다.
환란후설에 따르면 교회는 현재에 대환란을 경험할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에 선택이란 말은(환란후에 천사들이 택자들을 모을 것이다 -- 29-31). 성경에 그밖에 곳에서 그 말의 사용의 빛에서 이해해야 한다. 거기서 그것은 신자들을 의미했다. 오순절 이래로 택자란 말은 교회를 가리켰다. 주님이 환란기동안 교회를 보존하실 것이나 대환란에서부터 교회를 떼어둠으로가 아니다.
환란후설은 하나님의 진노와 그 환란사이를 구분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성경에서 악자에게 임하는 것으로 말씀한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참고, 롬 1:18; 살후 6:16-17; 14:10; 16:19; 19:15).
다른 한편 신자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로 들어가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을 것이다”(롬 5:9; 역시 살전 1:10; 5:9). 그러나 성경은 신자들은 환란을 경험할 것을 분명히 한다(마 24:9, 21, 29; 막 13:19, 24; 계 7:14).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라 사탄, 적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한 악자들에 대한 진노이다.
환란은 시대를 통털어 교회의 경험이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한다”(요 16:33). 다른 중요한 언급은 사도행전 14:22; 로마서 5:3; 데살로니가전서 3:3; 요한1서 2:18, 22; 4:3; 그리고 요한2서 7절이다.
환란후설자들은 일반환란과 대환난 사이의 구분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들은 그 차이는 종류에서가 아니라 정돈에서만의 차이라고 믿는다.
교회는 교회 역사를 통하여 환난을 겪었으므로 만일 교회가 대환란을 겪는데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환란후설자들은 성경이 도피할 신자들이나 절박한 고통에서 지켜 갈 신자들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을 인정한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21:36에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파히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여 깨여 있으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 말씀 ekpheugo는 가운데서 도피한다는 의미이다. 유사한 언급이 계시록 3:10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환란후솔자들은 교회가 환란 가운데서 지켜질 것이지만 그것이 그 환란으로부터 저쪽으로 지켜질 것이라고 논증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애굽에 있던 재앙 기간 이스라엘 백성의 경험을 상기한다.
환란후설자들은 역시 공중에서 우리가 주님을 만난다는 바울의 데살로니가전서 4:17에 언급을 다르게 이해한다.
환란전설자들은 이 사건이 휴거라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해 은밀하게 오실 것이며 환란이 끝날때까지 신자들을 그와함께 구름으로 잡아 올려 그들을 하늘에 있게 할 것이다. 그러나 환난후설자들은 조지 래드같이(George Ladd) 만나다로 번역된 헬라어의 다른 성경적 용도의 빛에서 동의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서 이 말에 대해서는 확실한 오직 두개의 다른 사건이 있을 뿐이다(마 27:32은 본문상 의심스럽다). 이런 창조의 하나는 분명하게 종말론적 비유인 지혜롭고 처녀들이 비유안에 있다. 신랑이 왔을 때 알렸다. 보라 신랑이로다 그를 만나러 나오라(마 25:6).
이 상황에서 그 말의 중요성이 무엇인가? 처녀들은 신랑을 만나러 나가지 않았고 그와 함께 떠나지 않았다. 차라리 그들은 그를 만나러 나갔으며 혼인잔치에 그를 수행하고 돌아왔다. 이 말의 다른 나타남은(행 28:15) 비종말적 역사적 이야기에서이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로마로 갔다. 로마에서 신자들의 한 그룹이 그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야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그들을 만나러 갔다.
이것이 바울에게 용기를 주었으며 그 후에 그 그룹은 그와 함께 로마로 돌아갔다. 이런 용례에 근거해서 래드(Ladd)는 그말 apantesis는 길에 있는 어떤 사람을 만나러 나가 그와 함께 그들이 나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환영그룹을 암시한다고 논증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은 저멀리 취해진 자의 경우가 아니라 그를 만나고 그와 함께 승리의 측근의 부분으로 땅으로 오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이 아니라 교회가 그 만남에 주위로 돌아올 것이다.
환난후설자들은 그들의 한 짝을 이루는 환난전설자들이 하는 것보다 마지막 일들에 관한 이해에서 덜 복잡하다. 예를 들면 환난후설에서는 재림이 한번만 있다.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오심과 환란의 뜻 사이에 막간이 없다. 거기에는 신자의 더해진 부활이 필요하다. 거기에는 오직 두개의 부활이 있을 뿐이다. (1) 환란기의 끝과 천년왕국 시작때 신자의 부활 그리고 (2) 천년왕국 끝에서 불경자들의 부활이다.
환란후설자들은 역시 하나의 기초적 연합으로써 종말에 사건들의 복합성을 본다. 그들은 재림 자체가 어느 순간에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임박하다는 의미니 아닐지라도 사건들의 복합성은 임박하다고 본다. 비록 그들은 임박함으로 재림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의 복된 소망은 신자들이 대환란전에 지구에서 옮겨질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주님이 무엇이 그런지 상관없이 신자를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실 것에 대한 확신이다.

중간적인 입장들
환란전설이나 환난후설에 모두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중재적인 입장들이 생겨났다. 세 개의 중요한 이론이 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환난중간설이다. 이 설은 교회는 보다 덜 심각한 환란을 통과할 것이라고 한다(일반적으로 첫절반 혹은 3년반). 그러나 그 후에 세상에서 옮겨진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의 한 공식에서는 환난을 경험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기 전에 옮겨진다는 것이다.

환난중간설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재림 교회와 함께 그리스도의 재림
환란 천년왕국

  
조정하는 입장의 두 번째 형태는 부분적 휴거설이다. 이 설은 휴거의 연속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신자들의 몫은 언제이든 예비되었으며 그들은 지상에서 옮겨질 것이다.
세 번째 조정의 입장은 즉각적인 환난후설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환란후대까지 일어나지 않는 동안 그것은 어느 순간이나 기대할 수 있다. 왜냐하면 환란은 이미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조정설 지지자들은 많지 않으며 특별히 근래에 더 그렇다.

문제의 해결
이상 여러 가지 사상들을 고려하고 평가해 볼 때 환란후설이 보다 더 성경적이라는 이유들이 있다.
1. 환난전설의 입장은 보다 더 꾸며낸 그리고 성경적 지원이 부족하게 보이는 몇 가지 구별을 포함하고 있다. 재림을 두 단계로 나누며 세 가지 부활의 가정 그리고 민족적 이스라엘과 교회의 날카로운 분리로 성경적 근거를 유지하기 어렵다. 환난전설은 민족적 이스라엘에 관한 예언들이 교회를 떠나서 성취될 것이며 따라서 천년왕국이 명백하게 유대적 특성을 지닐 것이라는 것은 새로운 계약의 소개와 더불어 일어난 근본적 변화의 성경적 묘사와 쉽게 조화되지 않는다.

2. 몇 개의 정확히 종말적인 구절들은 환난전설의 근거에 더 낫게 해석된다. 이런 구절들은 택자 개인들이 환란기간에 있을 것을 포함하며(마 24:29-32) 그러나 엄중함에서 보호될 것이다(계 3:10).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공중에서 만남에 대한 참고를 수반할 현상의 묘사이다(살전 4:17).

3. 성경적 가르침의 일반적 대의는 환난후설에 더 잘 맞는다. 예를 들면 성경은 신자들이 겪은 환란과 시험에 대한 경고로 가득하다. 그것은 이런 환란에서 옮겨질 것을 약속하지 않고 그것들을 견디고 이길 능력을 주신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환난후설에는 어려움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이론적 근거가 적다. 그것은 얼마간 여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환란후설이 보다 더 성경적이며 이성에 합치되는 사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