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바울서신에 나타난 복음의 대적자들과 그 관행
(1) 로마서에 나타난 복음의 대적자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단의 특징으로 복음을 거스리며 분쟁을 일삼고 그리스도 대신에 자신을 섬기는 자, 공교하게 순진한 자들을 미혹하는 자들로 묘사하고 있다(롬 16:17-18). 저들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배운 교훈을 대적하여 걸림돌이 되게 하는가 하면 교회 공동체안에서 분열을 책동했다. 그리고 이단적인 교리로 영혼을 멸망으로 이끄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저들에게서 떠나라고 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로 두 가지 사실을 지적했다. 먼저 이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 대신에 자신들의 배를 섬기는 자들이다. 배를 섬긴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여기서 바울은 대식가(gluttony)나 욕심 많고 낭비가 심한 생활양식을 가리켰거나(Goder), 지나치게 음식 규례에 빠지는 유대인의 경향을 가리켰다고 보기도 한다(Filzmyer). 그러나 바울에게 배는 자주 육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따라서 바울이 배를 섬긴다고 한 것은 이기주의자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리고 위의 해석들을 종합해 볼 때 이들은 자신들의 쾌락에만 관심이 있는 자들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이단들은 방심한 자들의 마음을 속였기 때문이다. 저들은 매끄러운 이야기와 좋은 말로 간교하게 순진한 성도들을 속였다.
(2) 고린도전후서에 나타난 복음의 대적자들 고린도서에서 이단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외에 다른 터를 닦아 둔 자들이며(고전 3:11),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간 자들이고(고전 4:6),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거부하는 자들이었다(고전 15:12). 고린도후서에서 이단자들은 말씀을 혼잡케 하고(고후 2:17; 4:2), 복음을 가리웠으며(고후 4:3), 불신자들을 혼미케 했다(고후 4:14). 더 나아가서 예수의 주 되심을 거부하고(고후 4:5), 다른 예수를 전하며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을 받게 한 자들이었다(고후 11:4). 바울은 이들에 대해 거짓 사도이며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가장한 사탄의 일꾼들이라고 했다(고후 11:13-15, 22). 바른 신앙은 그 터가 복음이며, 그 발판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메시지에 확고하게 정박하는 것이고(고전 1:23; 2:2), 그 기초 위에 설교와 가르침의 교훈으로 건물을 지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터(고전 3:11)를 닦아 둔다는 것은 그 기초를 부인하거나 건물을 복음의 메시지가 아닌 인간의 철학으로 지어 가는 것을 가리킨다. 이들이 바로 거짓 스승이요 이단이다. 이렇게 거짓 스승의 이단자들은 복음을 떠난 자들이다. 부활을 거부하는 자(고전 15:12)라는 말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복음의 핵심이 십자가와 부활이 아닌가?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기독교 설교와 믿음의 공통 근거다. 고린도후서의 거짓 스승은 고린도전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전서의 이단이 얼마나 복음의 대적자이었는지 결론적으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일꾼이기보다 사탄의 일꾼이라고 했다. 저들은 기초가 되는 복음을 혼잡케 함으로써 다른 기초를 만들었으며, 건물을 세우는 설교와 가르침도 설계자 되신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적합한 재료를 써서 건물 규정에 맞게 건축하지 않았다. 거짓 스승들의 이런 활동의 목적은 교회를 속이며 사람들을 미혹해서 그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심에서 타락케 하는 데 있었다. 이런 목적을 위해 저들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사도요 바울과 동등한, 아니 그 이상의 진실된 일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울은 저들과 전혀 달랐다. ① 바울은 순수한 동기에서 진실되게 말했다. ②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말했다. 그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이었다(갈 1:15-17). ③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말했다. 그의 이름으로 그가 하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들으셨으며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었다(4:2; 5:10; 12:19). ④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말했다. 그가 지금 말하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만났던 다메섹 사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었다(참고, 4:13-14). 따라서 거짓 스승들과 바울은 전혀 달랐다. 바울은 하나님의 생명의 법을 전하고 가르쳤으나, 거짓 스승들은 헛된 속임수의 인간 철학을 전파했다. 바울은 영혼을 살렸으나, 저들은 영혼을 죽일 뿐이었다.
(3)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복음의 대적자들 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며(3:24) 믿음으로 의롭게 된 신자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3:25).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된 자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다(4:1-7). 따라서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유대인, 이방인, 종이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의 구별이 없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했다(3:26-29). 그러면 갈라디아서에서 복음의 원수요 거짓 스승들은 누구였는가? 갈라디아서에서 저들은 거짓 형제요 가만히 들어온 자로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를 엿보고 종으로 삼으려는 자들(2:4)이었다. 그들이 누군가? 여기서 바울의 대적자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와 베드로였다는 주장이 있고(F.C. Bauer),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유대인으로 바울과 잠시 동역했던 바나바라는 주장이 있다(Hans Litzmann).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복음의 대적자들은 율법의 준수를 강조하며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자들이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도 유대인처럼 율법을 지켜야 하며 할례만 아니라 절기도 지켜야 한다는 자들이었다(갈 2:3-19, 24; 4:9-11; 6:13-14). 따라서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는 바울의 대적자들은 유대주의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에 대한 바울의 논증은 분명하다. 이방인들은 유대인의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용납된다. 율법 아래서 사는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율법의 저주를 상속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로워졌다(갈 3:6-7). 이방인들은(모든 민족) 아브라함과 연관되어 복을 받게 되기 때문에 아브라함 안에서 칭의되었다(3:8; 창 18:18).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약속으로 칭의되었다면 그들도 반드시 아브라함이 의로워졌던 것처럼 의롭게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칭의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음의 대적자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지킴으로써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던, 믿음에 행위를 더한 다른 복음을 전했던 유대주의자들이었다.
(4) 빌립보서에 나타난 복음의 대적자들 빌립보에서 복음의 대적자들은 갈라디아서에서처럼 유대교의 전통을 따르고 지키게 하려는 자들이었다. 바울은 저들에 대해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며 손할례당을 삼가라 했다(빌 3:2). 또 저들은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로(빌 3:3), 십자가의 원수로 행했다. ‘저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이며 땅의 일을 생각하므로 저들의 마침은 멸망일 뿐’이라고 했다(빌 3:18-19). 그러면 저들이 개와 같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영어에서 개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무가치하거나 저속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이 말은 구별되게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언약 공동체 밖에 있는 자들로 이방인을 가리키며 의식적인 불결함으로 간주되었다(예: 수로보니게 여인, 막 7:27). 여기서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에게 그런 이방인의 명칭을 주고 있다 유대주의자들은 이방인들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저들은 율법의 선을 행한다고 하나 그것은 참 신자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다(갈 3:10; 5:3; 6:13; 고후 9:8; 엡 2:10; 골 1:10). 저들은 세속적인 마음을 지닌 거짓 형제로 그들의 가르침은 육신의 일을 하도록 이끌 뿐이다(갈 2:4; 5:13-21; 빌 3:18-19). 저들은 참 할례자(마음)가 아니라 육신의 절단자일 뿐이었다. 따라서 저들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었다. 여기서 십자가는 구속을 의미하며, 그 반대는 인간의 지혜와 능력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걸맞게 살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그들 앞에서 보여 준 삶의 패턴과 반대로 행하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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