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베드로후서의 이단

  베드로후서는 거짓 교훈에 대한 비판과 경고에서 유다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그 거짓 교훈이 제2세기 영지주의에서 보여지는 초기 형태라는데 동의한다.
이 거짓 스승들은 예수의 주되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벧후 2:1; 유 1:4). 그들은 아가페(애찬)를 더럽혔다. 더 나아가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율법의 위치를 극소화하고 자유를 강조함으로 그들 스스로를 부도덕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음탕한 생활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오염시켰다(벧후 2:10, 12ff, 18ff; 유 1:4, 12). 또 지은 말, 유창한 말, 간교한 말로 어떤 유익을 얻고자 했다(벧후 2:3, 12, 14-15, 18; 유 1
;16). 그들은 주님께만이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와 천사의 능력에도 냉소적이었다(벧후 2:1, 10-11; 유 1:8). 그들은 그들의 주장에 대한 지원으로 꿈꾸는 자나 선지자들로 가장했다(벧후 2:1, 유 1:8). 그들은 아집에 빠졌고, 분파를 세우며, 우월감에 가득 찬 교만한 자들이었다(벧후 2:2, 10, 18; 유 1:19).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는 거짓 스승을 주의하라고 경고하면서(2:1-3) 심판과 구원의 예를 든 후(2:4-10a) 그들의 변덕스러움(2:106-12)과 악을 사랑하는 특성을 지적했다(2:13-16).
무(Douglas J. Moo)는 거짓 스승의 윤곽을(1b-3) 여덟 가지로 언급했다.

(1) 거짓 스승은 그들의 생활 방식에서 변덕스러웠다.
     그들은 사도적 교훈이 무익하리라며 그들의 거짓 사상을 은밀하게 소개하는 자들이다(갈 2:4)
(2) 그들은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그들을 사신 주님까지 부인했다. ‘주권적인 주’라는 말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에게만 네 번 사용되었는데(막 2:29; 행 4:24; 유 1:4; 계 6:10)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가리켰다.
(3) 그들의 교훈의 결과는 멸망이다: 그들의 종국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영원한 상실이다(요 12:25; 롬 14:15; 고전 1:18; 고후 4:3; 살후 2:10)
(4) 이런 거짓 스승의 불경은 그들을 따르는 자와 다르지 않다. 종말적 심판으로 멸망한다.
(5) 이런 거짓 스승들의 인기는 대단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부끄러운 길을 따를 것이다.
(6) 그들은 기독교에 해로운 영향을 끼쳤다. 그들의 잘못된 사상과 타락한 행실은 신자들을 바른 진리에서 떠나게 할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부끄럽게 했다.
(7) 거짓 선생들은 욕심이 동기가 되었다(v.3). 베드로는 그들을 불의의 삯을 사랑한 발람에 비교하고 있다(2:14, 14).
(8) 이 구절(1-3절)은 우리에게 거짓 스승들의 마지막 특성을 소개해 준다. 그들의 교훈의 기초는 그들이 만든 이야기다(1:16).

  그러면 사도 베드로가 지목해서 경고했던 이단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후대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과 연관이 있는 것인가? 여기 베드로가 경고한 이단은 후대의 영지주의 사상과 유사점이 많다. 그들이 우월감을 가지고 영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주장과 뛰어난 지식을 소유했기 때문에 교회의 지도자들보다 낫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린(Michael Green)은 여기 나오는 이단은 후대의 영지주의와 연관이 있기보다는 전적으로 1세기 초나  1세기 중반의 것이라는 데 신빙성을 둔다.

6) 요한서신에 나타난 이단

요한서신에서 복음의 대적자들은 몇 가지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1) 저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한다. 저들은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하지만 어두움 가운데서 행한다(요일 1:6). 하나님을 안다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지 않는 거짓말쟁이요 진리가 그 안에 있지 않은 자들이다(요일 2:4).
(2) 저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없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요일 1:8, 10).
(3) 저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했다. 저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였다.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지식은 서로 연계되어 있어서 아들을 부인하는 것은 아버지를 부인하는 것이다(요일 2:22-23). 저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했다.
(4) 저들은 물과 피로 오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했다. 예수는 피로 오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의 중요성을 부인한 것이다.
(5) 저들은 동료 신자들에게 사랑을 보여 주지 못했다(2:11).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이며 살인자에게는 영생이 없다(요일 3:15).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다(요일 4:8).
(6) 저들은 죄를 지었으며 옳은 일을 하지 않았다. 저들은 지속적으로 죄를 지음으로 처음부터 범죄한 마귀의 자녀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다(요일 3:8).

  그러면 구체적으로 요한서신에서 지칭하고 있는 이단은 누구인가? 스몰리(Smalley)는 요한의 공동체 안에는 구별된 세 그룹들이 있었다고 한다.
(1) 처음부터 내려온 사도적 교훈에 헌신된 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요한일서 저자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2) 유대주의의 배경을 지닌 사람들로 예수께 헌신했으나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다.
(3) 이교의 헬라적 배경을 지닌 자들로 이원론(영지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온 사람들이다.

  클라우크(Klauck)는 2:15-17과 3:17의 빛에서 이들은 요한의 공동체에 머물러 있었던 사람들보다는 재정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더 나은 자들로서 교회를 위해 모임의 장소를 마련하고 순회하는 선교사들을 접대한 사람들이었다고 보았다.
  크루세(Kruse)는 성경 이외의 교부들의 저작에서 요한의 대적자들이 누구인지를 찾으려고 했다. 그는 이레니우스(Irenaeus)의 「이단에 반박하여」(Against Heresies)를 근거로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 인성을 부인하고 그가 고난당한 것은 외관상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며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해 고난당하신 것을 부인했다고 본다. 그들은 역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실천적 사랑을 보여 주지 않고 가현설을 주장했다. 이그나티우스도 저들이 유대주의와 강한 유사성이 있을 뿐 아니라(Ign. Magn. 10:1-3) 저들의 교훈을 제2세기 영지주의자 발렌티누스(Valentinus)와 바실리데스(Basilides)와 동일시했다.
  크루세는 요한서신의 주석에서 쉬나켄베르크(Shnackenburg)의 말로 결론짓기를 “요한일서와 이서의 이단은 그 시대에 알려진 이단의 어떤 다른 것들과도 병행될 수 없다. 그들은 모두 유일한 참 구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약화시켰다. 그들은 그의 육신과 피를 통한 구원의 길을 모두 부인했다. 따라서 그들은 영지주의 안에서 그 실체가 드러난 거짓 기독교의 경향에 대한 한 예였으며 교회에 그런 위협이었다”고 했다.
  영지주의의 특성은 물질이 악하며 물질을 창조한 구약의 하나님은 악신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역시 그리스도는 선신으로 보았으나 예수와 그리스도를 구별했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예수의 몸에 내려졌을 뿐이며 하늘의 그리스도는 악의 몸을 입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고 하여 가현설을 주장했다. 따라서 요한서신에 나타나는 복음의 대적자들은 영지주의적인 요인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영지주의 사상을 염두에 두었다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제2세기 기독교 작가 중에 이레니우스는 그의 이단의 반박에서 영지주의자들을 거명하며 비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나 야마우치(E.M. Yamauchi)가 지적하고 있듯이 제1세기에 소위 영지주의가 존재했었는지는 아직도 증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복음의 대적자들에 대한 요한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요한은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육신을 입고 오시지 않았다고 하므로(참고, 요일 4:3; 요이 1:7)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했다고 본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두 성품,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부정했다고 본다. 요한은 신자들에게 영적인 전승을 상실해서는 안 되며 거짓말하는 이단들을 가정이나 교회로 초대하지 말며 그들의 악한 일에 동조하지 말 것을 권했다(7-11절). 요한이서에서는 거짓 스승들을 접대하지 말라고 했고, 요한삼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는 자들을 후대하라고 권했다(요삼 1:8). 저들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며 도움을 줌으로써 진리를 위한 사역을 함께 하라고 권한다(요삼 1:7-8).

7) 유다서에 나타난 이단

  유다서는 믿음을 위한 싸움이 그 주제다. 따라서 거짓 스승에 대한 언급과 정죄를 언급한 후에 믿음에 굳건히 설 것을 권면하고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마친다.
유다서는 거짓 스승들은 가만히 들어온 몇 사람으로 그들의 특성을 다음의 네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1) 그들의 정죄는 이미 오래 전에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예언된 선지서에 언급되었다(4절).
  (2) 그들은 경건하지 않았다. 여기서 불경건한 자들은 예배에 실패한 자들이나(롬 4:5; 5:6; 딤전 1:9; 벧전 4:18), 이론적인 무신론자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하나님께 불경건한 자들이다. 윤리적으로 부도덕한 생활 습관을 지닌 자들이다(갈 5:19).
  (3)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자들이다. 그들은 부도덕한 자들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값없는 용서를 죄된 행위를 위한 방편으로 곡해했다. 그들은 무절제한 악행자들이요 방탕한 자들이었다(벧전 4:3; 벧후 2:2, 7, 18).
(4)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주권자이시며 주님이심을 부인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했으나 그들의 행위가 그것을 부인했다(딛 1:16). 예수님의 유일한 아들 되심을 배척한 자들은 역시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부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저들은 예수를 떠나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에 머물고 있었다.

이런 유다의 반대자들은 그 교회의 회원일 뿐 아니라 교사들이었다(11-13절). 그들은 현재 그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예언하고 가르쳤으며 교회의 교제에 참여했다(12절). 초대 교회에서 다른 순회 교사들처럼 이들은 교회의 대접과 지원으로 생활했다. 따라서 추종자들로부터 물질적인 이익을 위해 욕심이 동기가 된 자들이라고 질책했다(11-12절).
   이들은 도덕 폐기론자들이며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장래의 심판도 부인했다. 그러면 이들이 누구였는가? 어떤 이단과 연관이 있었는가? 많은 주석가들은 유다의 공격 중에 어떤 목표로서 영지주의 교리들을 찾아낸다. 가현적 기독론(4) 데미 우르게의 교리들과 하나님의 통일성을 부인한 거짓 선지자들(4, 8.25) 그리고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으로 인류에 대한 영지주의의 구분(19)으로 보아 저들은 유다서를 영지주의 때인 2세기 후반의 저작으로 본다. 이에 대해 바컴(Baucham)은 고린도에서 발견되는 도덕 폐기론자들을 들어 유다서의 저작 연대를 주후 50년대로 보며 유다서의 대적자들에게서 영지주의적인 요인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해서 꼭 영지주의자들이었다고 못 박을 수는 없다는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저들은 하나님도 복음도 알지 못하는 거짓 스승들이었다. 그들의 방탕한 생활이 바로 그들의 무지에 대한 증거였다. 신약성경의 기록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이지 죄를 조장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유다는 참 복음은 첫 개종자들에게 전파된 교회의 설립자들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저들의 가르침은 사도들과 그들이 전해 준 복음과 상관이 없었다.

8)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이단

  요한계시록에서 교회를 핍박하고 불경한 자들을 속이는 대리자는 국가였다. 국가가 정치와 종교 그리고 경제적인 동맹에 권위를 주었다. 계시록은 교회의 대적자를 짐승으로 소개하는데, 그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네 왕들이었다(단 7:3, 4, 5, 17).
  ‘짐승’이라는 팔레스틴에서 사탄, 적그리스도, 로마 제국의 제사장직, 로마 가톨릭 교회(종교개혁자 포함) 및 거짓 스승들과 다양하게 동일시되어 오고 있다(Charles). 짐승의 종교적인 역할은 주로 거짓 선지자로 불렸다(16:3; 19:20; 20:10). 거기서 참 선지자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경배하도록 인도하나 거짓 선지자는 국가를 숭배하게 한다. 짐승은 이처럼 다양한 때에 많은 형태로 교회 안에 있는 거짓 선지자나 국가와 동일시되었다(2:2, 14-15, 20-24). 이에 대해 왓슨(Wattson)과 어니(Aune)도 신구약 중간기 후기 유대주의에서 거짓 메시야는 두 가지 형태로 등장한다고 했다. 그 하나는 외부에서부터 오는 폭군으로 하나님을 반대하고 그의 백성을 압제하는 자로 다니엘서의 작은 뿔에 근거하며, 다른 하나는 공동체 안에서 나온 거짓 선지자로 사람들을 속이는데 신명기 18장 18-22절에 나오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반대한다. 이들은 불법의 사람(살후 2장)으로 결합된다. 계시록 13장에서는 두 짐승으로 분리되어 나타난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13:1-10)은 군사적 폭군인데 비해 땅에서 나온 짐승(13:15-18)은 거짓 선지자다(16:13; 19:20; 20:10).
  이런 짐승 같은 거짓 선지자는 항상 구약에서는 언약 공동체 안에서 발생했다.  예수님의 예언에서도 거짓 선지자와 거짓 메시아들이 믿음의 공동체인 지체 안에서 일어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마 24:5, 11).
이들의 역할은 언약 공동체 안에서 속이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거짓 스승들은 어떤 점에서 로마의 사교들과 연관이 있는 문화의 우상 숭배적 기관들과 타협하도록 용기를 주었다.
  1) 짐승은 사역과 권위 모두에서 그의 주인의 후계자다(계 13:12a; 비교, 행 1:1-11).
  2) 그의 주인을 경배하도록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그의 시도는 그의 주인의 부활과 연관이 있다
      (계 13:12, 14: 참고, 행 2:22-47).
  3) 그는 그의 권위에 대한 확고한 표명으로 표적을 행한다(계 13:13; 참고, 행 2:43; 5:12; 15:12).
내외적으로 속이는 위협도 다니엘서 11장 30-37절의 예언과 연관이 있다. 다니엘서는 그들을 속이는 자로 불렀다(단 11:34). 기독교의 스승들은 그들의 주된 단서를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았는데 그들은 주변 분파로부터 찾았다.  오스본(Osborne)은 짐승을 신약의 예언에서 적그리스도로 예상된 자로서 큰 성 바벨론이라는 제국을 이끌 자로 보았다(14:8; 17:5; 18: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