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교회와 이단



  이단이라는 말은 항상 동일하게 사용되지 않았다. 시대가 변천해 가면서 보편적이고 정통적이라고 하는 교회의 입장에 따라 그 적용의 범위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로마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모든 개신교가 이단이었다. 그들에게 하나의 참 교회는 로마 가톨릭이며, 그 교회에서 떠난 모든 교회나 그룹은 이단이었다.
  그들은 개신교를 급진적인 운동들, 예를 들어 재세례파 중에서도 크게 빗나간 뮨스터파(Munsterites)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가장 급진적인 이단들은 신학적이기보다 사회적이었으나, 교리적으로 정통에서 멀어진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들은 기독교 국가의 합법성을 부인했다. 따라서 이단에 대한 판단과 체벌 역시 교회적이기보다는 교회와 국가의 연합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흔했으며, 이는 개신교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교회사에서 근세는 일반적으로 종교개혁 이후 1648년 이후로 본다. 이 시대는 이성주의, 부흥주의 그리고 교파주의 시대였으며 신앙의 자유와 성경 해석의 관점의 차이로 가장 중요한 구원론을 제외한 교리와 사상 또한 교회의 의식과 관행에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또 성경 계시보다 이성을 중시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반대하는 등 이단적인 사상이 발생했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신비주의 운동이 득세하기도 했다.

제1장 이원론적인 신비주의 이단



1. 사랑의 가정 The Family of Love

  사랑의 가정은 이성의 시대에 속하는 이단으로 조리스(David Joris)의 경력에서 생겨난 분파였다. 그는 1530년과 1540년까지는 정통적인 재세례파의 입장에 서 있었으나 그 이후에는 좀 더 신비적이고 비정통적인 경향으로 흘렀다. 그는 자신을 메시아로 주장했으며 부도덕한 생활과 다처제를 지속했다.
  니클라에스(Hendrick Nixlaes, 약 1502-1580)가 그를 후계하면서 그의 본 고장인 저 지역 나라들에서 따랐으며, 영국의 엘리자베단(Elizabethan England)에서 번창했다. 사랑의 가정의 사상은 분명하지 않았고, 쉽지 않은 영어로 표현되어 관리들을 속이기가 용이했으며 그것들의 참된 의미의 해석이 쉽지 않았다. 그들의 영적 용어는 신비주의의 극단적인 형태였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었으며(그들의 목적에 부합한 곳은 예외임), 외적인 의식이나 제도들은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의식주의가 가톨릭 교회보다는 적어서 개신교와 같았다). 이들은 가톨릭과 개신 교회들의 공동 파문과 추방이 빈번해지면서 혼란과 분쟁으로 이끌렸다. 이 단체는 이성적으로 교훈이 이해되어서가 아니라, 신비로 유지되었다.
  1570년 중반부터 청교도 윌키슨(William Wilkison)과 로저스(John Rogers)는 니클라에스 사상의 침투에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사랑의 가정 교리를 파하기 위해 애썼다. 관리들에게 알려서 체포하게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몇몇 가정주의자들은 후에 체포되었으나 1579년에 에리(Ely)의 감독 콕스(Richard Cox)는 사랑의 가정이 한 지역에서 그렇게 왕성한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교리의 신비화는 극단적인 것이었지만, 그들의 믿음의 비전적 특성(esoteric) 때문에 제한적으로만 드러났기에 사회적으로는 해롭지 않을 정도였다. 사랑의 가정파는 지도자의 메시아적 신분을 주장했기 때문에 그 지도자의 죽음으로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1580년 콜론(Cologne)에서 니클라에스는 생을 마감했다. 이 파는 17세기까지 지속되었으나 점차 줄어들었으며 마침내 17세기 중반에 가서 사멸되었다.1) 사랑의 가정파는 극단적인 신비주의였으며 성경을 문자적이 아닌 비유나 말세의 교리로 해석하면서 부도덕한 생활을 한 지도자(메시아)를 따른 이단이었다.

2. 클리스티파와 스콥시파 The Khlysty and Skoptsy

  클리스티 혹은 키리스토보브리(Khlysty of Khristovovrie)는 초기에 러시아 정교회에서 분리해 나왔다. 이 파의 기원은 필리포프(Danila Filipov)의 지도 아래 17세기 후반에 발생했다. 필리포프는 분파의 지도자가 되기 전에 옛 신자들(the Old Believers)의 사제가 없는 파의 한 교사로 일했다.
  이 운동의 강조점은 각각의 신자들 안에 계신 성령이며 크리스트스(Christs)로 부르는 지도자를 따랐는데 그 안에는 하나님의 충만이 거한다고 믿었다.

1) 클리스티파의 사상 및 관행
  필리포프(Filipov)는 물론 크리스트스의 하나였고 여신(godded)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니콜라이(Hendrik Niclaes)의 ‘하나님의 여신’(godded with God)이란 유명한 구절을 상기시키는 표현이었다.
  두 사람과의 유사성이 직접 연관이 있어서든지 혹은 우연이었든지 이들은 가족파(Familists)와 유사했으며, 다른 그룹은 영지적 형태의 그룹들로 존속되어 왔다. 이들은 교구 교회들 안에 있는 온전히 은밀한 운동의 신자들이었으며 외적인 의식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았다.
  역시 영지주의자들처럼 육신은 그 자체와 안에 악이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고기뿐만 아니라 생선까지도 먹지 않았다. 이들은 역시 초기에 이단과 유사한 방식으로 예수의 성육신 문제에 접근했다. 그리스도의 영이 세례 때 예수에게 임했으며 그의 신성은 양자론자의 견해를 의미했다. 그러나 이원론 역시 성욕과 연관을 갖는다. 결혼은 개종자에 의해 거부되었으며 독신이 요구되었다.
  클리스티파는 금식을 한 후에 성령 충만한 황홀경에 도달하기 위해 노래하며 춤을 췄다. 그들 노래의 다수는 광적인 것이었으며, 이들에겐 성경과 동등한 니가 고루비나(Kniga Golubina)와 도브서(Dove Book)가 있었다.
  클리스티파는 수많은 성육신이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많은 그리스도가 있었으며 예수는 그리스도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착한 일을 함으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2)

2) 클리스티파에 대한 대응
  클리스티파 운동은 코스트로마, 발디미르바, 모스코(Moscow)에서 번창했으며, 관리들은 1733년 이 분파를 300개 찾아냈다. 이들 중에 한 여인은 귀족이었고, 8명은 수도승이나 수녀들이었으며 이 농부였다. 그들 중에 5명만 사형에 처해졌으며, 나머지는 채찍에 맞거나 혀가 잘렸다. 그리고 카자크스나 시베리아의 변방으로 끌려가 중노동을 했다. 그들 중 도시에서 도피한 자들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그들의 사상을 전했다.
  1745-1752년 모스코바에서는 연속적인 종교재판으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과 불에 달군 쇠를 자유롭게 사용했다. 450명이 희생되었는데 5명을 불에 태웠고, 다른 26명은 다양한 방법으로 처형시켰다. 나머지 대부분은 추방시켰으며 그들 중에 몇 사람은 코가 잘렸고 가 농부였다. 전체 인구에 비해서는 소수였으나, 1900년에 이 운동은 10만 명의 회원이 있었으며, 특별히 발틱(Baltic) 지방에서 강했다.

3) 클리스티파의 분열
  클리스티파는 18세기와 19세기에 여러 번 분열되었다. 이들 중에는 스콥시란 이름을 갖게 된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들 특유의 관습으로 불세례가 있었다. 그 목적은 한 번의 행위로 육신의 욕망을 대적해야 할 싸움을 피하는 것이었다. 여성 신자도 끔찍한 자기 절단의 특권으로 그들의 유방을 절단했다. 놀랍게도 이 그룹은 현대까지 존속하고 있다.
  이 파의 창시자는 이바노프(Andrei Ivanov)였는데 역시 셀리바노르(Kondrati Selivanore)로도 부른다. 1770년경 그는 툴라(Tula)에 있는 클리스티파의 크리스트스로 행세하면서, 거기서 이 운동은 수천 명에 이를 정도로 득세하였다. 그는 유별난 계율주의에 빠져 마태복음 19장 12절에 따라 한시적으로 자기 몸에 불에 달군 쇠를 사용했다. 이 관행은 1772년 전 어느 시점에 행해졌고, 그 이래로 그것은 관리들이 그의 행동에 대해 비판한 이유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얼마의 추종자들을 얻었기 때문인데, 그 추종자들 중 13명의 농부들이 그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1775년 시베리아로 추방된 이바노프(Ivanov) 자신은 그의 아내 대 캐더린(Catherine the Great)에 의해 살해된 황제 피터 3세로 행세했다(그러나 그는 실제로 살해되지 않았다).
  그는 20년 후까지도 성 피터스버그(St. Peteusburg)에서 생존할 수 있었고 거기서 많은 사람들을 설복했다. 그의 타고난 술수의 특별한 시험에 말려든 사람들은 농부들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많게는 100명에게 시술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밖에 자신들에게는 손대지 않기로 한 많은 이들도 그를 성도와 거룩한 자로 존경했다.
  이바노프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종말적으로 그가 다시 올 것을 기대하게 했다. 19세기에 그들의 수는 십만 명이나 되었다.3)

요약과 평가
  클리스티파와 스콥시파는 물질이 악하다는 영지주의 사상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은 이단 종파였다. 따라서 성적인 관계로 물질적인 몸을 낳는 것은 죄 중의 죄였다. 그들은 육체의 욕망 자체를 죄로 보고 그 죄를 극복하기 위해 시험의 방편이나 도구가 될 수 있는 부분을 절단함으로써 거룩을 추구했다. 또 고행과 선행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인간의 죄는 지체의 문제이기 이전에 마음의 문제이며 성적인 욕망은 많은 정욕 중의 하나일 뿐임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했다. 어느 점에서 이들은 중세 초기에 있었던 금욕주의자들보다 더 심한하게 고행적인 금욕주의자들이었다.


<주>
1) Meic Pearse, The Age of Reason(Grand Rapids: Baker, 2006), 209.
2) 케니스 래토레트, 기독교사(중), 윤두혁 역(서울: 생명의말씀사, 1993), 580.
3) Ibid., 215-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