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
이 본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의 구속을 이루기에 불충분하며 바울의 고난을 더하므로 완전하게 된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곳에서 바울의 주장과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크게 모순 된다. 더 나아가 바울의 고난이 그 교회를 위한 것이라 하였는데 실제로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세우지도 않았으며 또 그 교회를 방문하지도 않았다(1:3-8). 그러면 이 본문의 참 뜻은 무엇인가? 특별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이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바울의 고난에 대해서는 분명한 구분을 지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위한 고난과 그의 죽음은 사람을 위해 칭의와 화해를 가져 온 것으로 유일한 것이며 반복할 수 없는 것이다.1) 이것은 바울이 본서에서 누누이 강조 언급하고 있는 사실이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그의 목적에서 분리시키는 죄와 노예와 죽음의 모든 세력을 파쇄하셨다(2:13-15). 그 결과 신자들은 어두움의 지배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나라로 들어왔다(1:13). 이처럼 그를 통해서 구속과 죄의 용서가 주어진 것이다(1:14). 한 번 하나님께로부터 소격되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화해되었다(1:22)). 그뿐이 아니라 로마서에서도 바울은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칭의와 화해는 완성된 사건이다(갈 4:1-7; 고전 1:21-30; 엡 1:7, 13-14).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그 사역을 위한 고난과 죽음은 단번에 완성된 사건으로 (히 9:12) 어느 누구도 거기에 무엇을 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바울은 어떤 의미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쓰고 있는가? 학자들은 바울의 이 용어의 이면에는 적어도 세 가지 역사적 배경이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1. 역사를 통한 이스라엘의 경험으로서 특별히 애굽의 노예, 바벨론의 포로, 수리아와 로마의 압제에서 고난들은 하나님의 구속적 목적의 부분이나 일부로 이해되었다. 하나님의 의로운 자나, 하나님의 특별한 종들의 고난은(시 34:19; 37:39; 50:15) 가끔 대표적이며 대속적이었다(사 53장). 2. 묵시문학에서 다니엘 10:1과 함께 시작되는 하나님의 구속적 사역의 완성 전기와 메시아 시대에 하나님의 통치 이전의 시기는 대환난의 시대로 묘사되었다. 이런 환난들은 메시아의 고난으로 알려졌으나 메시아에 의해 견뎌야 할 환난을 가리키지 않고 메시아 시대에 발생될 고난이다. 3. 선견자들은 이 고난의 시대가 제한될 것을 알렸으나 오는 시대가 밝았으며 하나님께서 경험해야 할 고난을 위해 한정된 기간을 결정하시리라 하였다. 이런 유대적인 배경에서 바울은 말세가 도래했으며(고전 7:29) 현시대는 어려운 위기의 때이므로(고전 7:26) 이 말세에 살면서 그리스도와 그의 고난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다스림의 영광을 나누는 전조라고 하였다(롬 8:17-18).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메시아의 고뇌를 가리키는데, 말하자면 말세에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 체험될 고난이다.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자신의 선교 사역에서 체험한 고난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고난에 부분으로 보였던 것이다.2)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체들 안에서 계속 고난을 받으신다고 보았다. 그가 믿는 자들을 결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것은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것이었다. 그 순간 이후 바울은 실제로 유대에 있는 그의 제자들에게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당했다. 그때부터 그는 그 자신의 몸에 그리스도께서 아나니아에게 하신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9:16)는 말씀을 이루는 경험을 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과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한 고난은 같은 의미이다. 이렇게 그리스도 자신이 그의 지체 안에서 고난을 받으심과 같이 그들의 이 고난은 그리스도의 개인적 고난을 채우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3)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위한 수난을 가리키지 않는다. 라이트푸트(Lightfoot)의 해석에 따르면 여기 `고난'(thlipseon)이란 헬라어는 결코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가리키지 않고 그의 생애와 사역의 역사에서 우리 주님이 견디신 환난을 가리킨다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모든 성도와 순교자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충한다고 하였다.4) 그러면 부족한 것, 남은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 말은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에서 불충분함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바울에게서 그리스도의 고난(그를 따르는 제자로서)이 부족한 것을 가리킨다. 그의 경험에서 죄수로서 사도는 고난의 얼마를 채우고 있었으나 그를 위해서 아직도 견뎌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Curtis Vaughan). 이제 여기서 이 본문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을 소개하고 간단히 평가하기로 한다.
1. 빈디쉐(H. Windisch)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고난이 아직 부족한 것으로 사도에 의해 공급되어야 한다는 해석을 하였다. 따라서 바울이 그리스도 가 못다한 구속적 고난을 대신 완성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성경의 전 교훈과 전혀 맞지 않는 이론이다. 2. 17세기와 18세기에 개신교의 보편적인 학설인데 그리스도의 고난(속격)대신에 목적격으로 이해를 해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으로 해석한다. 그러 나 이 설의 문제점은 무엇이 모자란단 말인가? 어떻게 사도가 이런 고난을 채울 수 있는가가 난점이다. 3. 여기 그리스도의 의를 바울의 고난과 일치시켜 그리스도의 것과 유사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여전히 난제이다. 4. 신비주의의 견해로 바울이 당한 고난은 그리스도와 그의 신비적 연합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갈 2:20).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와 신비적 교제에서 체험되는 그런 고난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리스도의 남은 것에 대한 해답이 못 된다.5)
위의 보우건(Curtis Vaughon)의 해석처럼 여기서 남은 고난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의 고난으로 아직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더 견뎌야 할 고난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이런 고난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이므로 필연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는 공동 운명체가 아닌가?
주 1. F.F. Bruce, Colossians, p.216 2. M.T. Bruch, Hard Sayings of Paul. pp.236-237 3. F.F. Bruce, Ibid., 4. Curtis Vaughan, Colossians(E.B.C. Vol. 11), p.190 5. Peter. T. O'Brien, Colossians, Philemon, pp.77-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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