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세워 내 부친 다윗의 위에 오르게 하시고 허락하신 말씀대로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아도니야는 오늘날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왕상 2:24) 열왕기상 2:17-24에 보면 왕자 아도니야가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왕이 됐을 때 밧세바를 찾아가 왕께 구해서 아비삭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청을 받고 솔로몬 왕을 찾아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도니야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해 달라고 구한다. 그런데 솔로몬의 반응은 냉담했고 어머니 밧세바에게 차라리 저를 위하여 왕위도 구하라고 응수했다. 그리고 아도니야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였다. 그러면 왜 밧세바와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요구에 이처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아도니야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학깃에게서 낳은 네 번째 아들이었다(삼하 3:2-4). 그 이름의 뜻은 내주는 여호와란 말이다. 암논과 압살롬 즉 첫째와 셋째는 죽었고 둘째 길르압은 그의 출생 후에 언급이 없는데 아마도 죽은 것 같다. 따라서 아도니야는 살아있는 왕자들 중에서 장자였으며 왕좌를 열망하였다. 그는 왕이 되기를 시도했다가 실패하였다(삼상 1:5-2:25). 그는 버릇이 없으나 잘 생겼으며 병거와 기병과 전배 50명을 준비하였으며(왕상 1:5)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을 포섭하였다. 그러나 제사장들과 선지자 나단은 그의 편으로 만드는데는 실패하였다. 또 장수들은 다윗에게 속하여 그의 수하에 넣지 못하였다(1:7, 8). 그는 에느로겔에서 큰 잔치를 배설하고 그의 모든 왕자 형제들과 유대 왕의 신하 모든 사람들을 청했으나 나단 선지자와 브나야와 장수들과 그의 동생 솔로몬은 청하지 않았다. 나단 선지가 아도니야의 속셈을 밧세바에게 알게 하여 다윗 왕에게 고하게 하였으므로 다윗왕은 기혼에서 솔로몬의 왕임을 선포하게 하였다(1:11-40). 결국 아도니야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다 도망쳤고 아도니야는 두려워 제단 뿔을 잡았으나(1:49, 50), 솔로몬이 그를 용서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1:51, 53). 그런데 다윗이 죽자 아도니야가 스스로를 담대하게 하여 밧세바에게 구하여 다윗이 그의 마지막 병중에 간호사로 수종들게 했던 아비삭을 그에게 주도록 솔로몬 왕을 설득하게 하였다(2:13-18). 여기서 솔로몬 왕이 그의 어머니와 다르게 아도니야의 요구를 그에 대한 도전으로 본 것은 그의 부친 때 압살롬이 행한 과오를 너무도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아비삭을 아도니야에게 주도록 허락한다면 그것은 왕가의 타락에 대한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삼하 16:21). 더 나아가서 아도니야는 대담해져서 점점 더 큰 것도 서슴없이 요청하게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솔로몬은 그를 의심하게 되었으며 죽이게 되었다(2:19-25)(1).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요구가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정치적인 안목이나 이해가 부족했던 밧세바는 그 요구를 바로 이해하는데 실패했다. 단순히 아비삭은 다윗과 친밀하기는 했어도 그의 아내와 첩이 아니었으니(왕상 1:4) 무슨 상관이 있으랴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 밧세바로서는 살아있는 왕자 중에 아도니야가 장자였으니 자기의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된 것에 미안한 감이 들어 그를 위로하려고 했을지 모른다. 그러면 아도니야의 경우는 어떤가? 아도니야의 경우는 전혀 왕권의 도전은 아니었으나 어리석은 요구를 했고 결국 왕권에 대한 도전의 의혹을 받아 죽고 말았다(2). 솔로몬의 입장에서는 왕권의 도전자를 제거시킬 이유를 찾은 셈이고 그를 처형시킴으로써 왕권을 더 튼튼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배우는가? 권세를 탐하는 자는 화를 자초하기 쉽다는 사실이다. 왕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므로 순리로 주어질 때만 안전하게 누리고 지킬 수 있다. 그렇지 못할 때는 정권 상속자들간에 칼이 떠나지 않는 비극을 면치 못하게 된다.
주 1. The Zondervan Pictorial Bible Dictionary(Grand Rapids: Zondervan, 1967), p.15 2. J. Carl Laney, Answers to tough Questions(Grand Rapids: Kregel, 1997), pp.80-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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